옆 사람의 우산 –소외와 배제
비가 올 때 내가 가진 우산만이 아니라 옆 사람도 우산을 갖고 있는지 살피는 마음, 작은 단위의 마음으로도 변화가 시작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책이 있다. 황정은의 연작소설 『디디의 우산』 ( 창비, 2019 )이 그것이다. 이 책은 『 d 』와 『아무것도 말할 필요가 없다』가 함께 실린 연작 소설이다. 연작 소설이지만, 연결되는 이야기보다는 사회적인 사건들의 교집합 속에서 존재하는 작품이다.
황정은은 2005년 경향신문에 단편소설 『마더』가 당선되며 작품활동을 시작한다. 소설집 『일곱시 삼십이분 코끼리열차』, 『파씨의 입문』, 장편소설 『백의 그림자』, 『야만적인 앨리스씨』, 연작소설 『연년세세』등의 다양한 작품을 썼다. 만해문학상, 신동엽문학상, 이효석문학상 등을 수상했으며, 이 소설 『디디의 우산』 이 2019년 5 · 18문학상 본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 d 』에서 d의 연인 dd는 갑작스러운 죽음을 맞는다. 자신 또한 죽음과도 같은 날들을 보내다가 d는 청계천 세운상가에서 물류 일이라는 고된 노동으로 하루하루 보낸다. 이후 d는 세운상가에서 수십 년간 음향기기 수리를 해 온 여소녀와의 만남을 계기로 조금씩 세상 속으로 나온다.
작가는 『 d 』에서 어떤 돌파구도 보이지 않던 암울한 시기에 절망 속에서도 불꽃과 같은 돌파의 가능성을 이야기하고자 한다. d는 dd를 잃은 후 자신의 삶에서 죽음의 이미지를 반복적으로 감지한다. 그의 마비된 의식은 주변을 둘러싼 것들의 하찮음을 인지하는 데 익숙해진다. 작가는 인간이 상실과 소외의 경험 앞에서 무력해질 수밖에 없음을 강조한다. 『 d 』 후반부에서는 한국사회가 세월호 참사로 인한 상실의 아픔을 딛고 변화를 위해 저항하는 모습을 d의 의식의 흐름 위에 겹쳐둔다. 작가는 사회가 상실의 아픔을 극복해 가는 모습을 지켜보며, 개인이 삶의 가능성을 발견할 수 있도록 묘사한다. d는 촛불집회 현장을 돌아다니면서 죽음 이후 남겨진 사람들이 일으킨 혁명에 대해 생각한다. 작가는 개인적 삶의 구제, 극복도 모두 혁명이며, 이는 사소한 존재의 작은 움직임들로부터 시작되는 것임을 주장한다.
“d는 진공관을 바라보았다. 그 진공을, 그것은 흐르는 빛과 신호로 채워져 있었다. d는 다시 세종대로 사거리에서 느꼈던 진공을 생각하고, 거기 머물고 있는 사람들을 생각했다. 그들이 싸우고 있다는 것을 d는 생각했다. 그 사람들은 무엇에 저항하고 있나. 하찮음에 하찮음에.” (p144) 죽음, 상실을 경험하고서 이를 극복해가는 것이 비단 이 소설 속 주인공 d만의 것이 아닌 동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의 삶이 아닐까 성찰해 본다.
『아무것도 말할 필요가 없다』의 화자 나는 구두회사 직원이다. 고등학교 동창 서수경과 나는 1996년 이른바 ‘연대 사태’가 벌어진 연세대 안에서 재회하여 함께 살고 있다. 2014년 4월 16일 세월호의 비극을 목격한 이후 두 사람은 계속해서 광장으로 거리로 나선다.
『아무것도 말할 필요가 없다』에선 혁명이 이뤄진 사회에서도 또 다른 소외가 발생할 수 있음을 지적한다. 대표적인 소외가 여성의 권리문제와 성 소수자 문제이다. 주인공 화자는 자신을 여성의 프레임으로만 규정한 채 직장내에서 사회적 역할을 제한하고 부당한 요구를 당했던 기억들을 회상한다. 집회에서 시위대의 팻말에 쓰인 ‘악녀 OUT’이라는 문구에서 여성의 이미지를 낙인찍는 방식의 여성 혐오를 상기한다. 그리고 퀴어인 주인공이 연인(서수경)과 함께 있으면서도 언제든 주변에 의해 서로의 존재가 부정당하는 순간을 상상해야만 하는 현실을 떠올린다. 황정은 작가는 여전히 도처에서 새로운 죽음, 새로운 상실이 되풀이되고 있으며, 아직 혁명을 기다리고 있는 존재들이 남아있다고 강조한다. “탄핵을 바라며 거리로 나선 사람 모두에게 그 경험은 귀중하고 벅찬 역사적 경험이 되어줄 것이고 그리고 ······· 그렇지 내게도 그러할 것이다. 산다는 것은 우리보다 먼저 존재했던 문장들로부터 삶의 형태들을 받는 것 ······ 그래서 오늘은 그날일까. 혁명이 이루어진 날. 사람들이 말하는 것처럼 피 한방울 흘리지 않고 혁명은 마침내 도래한 것일까.” (p.314) 어떻게 살 것인지, 올바른 시민으로 살아가는 게 어떤 것인지를 고민하게 만든다.
『 d 』가 좌절에 대한 이야기라면, 『아무것도 말할 필요가 없다』는 차별과 탄압에 대한 이야기이다. 서사적 묘사보다는 관찰과 논평을 주로 보여주는 이 소설은 에세이풍이 감미된 강력한 페미니즘의 목소리를 들려준다. 우리 현대사를 관통하는 사건들 속에서 우리가 모르고 있었던 차벌과 배제의 목소리를 날카롭게 해부해 보여준다. 황정은 작가는 시대의 아픔을 예민하게 읽어내고, 삶을 뒤흔든 사건들에 대해 고민하고 성실하게 써내려간 소설가이다. 지금도 우리 사회는 사회적 참사와 비인간적 죽음이 발생하는 안타까운 현실에 놓여있다. 옆 사람의 우산을 살피는 마음은 그저 친절한 마음이 아니라 우산에서 소외되고 배제되는 사람은 없는지를 주의깊게 살펴야 하는 치열한 자기성찰을 불러 일으키는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