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험실 소녀
대구 김종협
‘랩걸(Lab Girl, 실험실 소녀)’라는 책이 있다. 호프 자런의 『랩걸』 (김희정 옮김, 알마, 2018)이 그것이다. 부제는 나무, 과학 그리고 사랑 이야기이다. 식물과 과학을 연구하는 과정에 겪었던 경험을 진솔하게 담고 있다. 식물과 나무에 관한 지식들을 전문 용어가 아닌 재미 있고 비유적인 말들로 풀어낸다. 보통 사람들이 잘 알지 못하는 과학자의 생활을 알기 쉽게 설명해 준다. 호프 자런의 인생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고, 실험실 소녀에서 여성 과학자가 되기까지 과정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호프 자런(Hope Jahren)은 1969년 미네소타 오스틴에서 태어났다. 캘리포니아 버클리 대학교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풀브라이트상을 세 번 수상했고, 2005년에는 뛰어난 지구물리학자에게 수여하는 제임스 매클웨인 메달을 받았다. 현재 노르웨이 오슬로 대학교에서 연구를 이어가고 있다. 최근작으로 『나는 풍요로웠고, 지구는 달라졌다』가 있다.
호프 자런은 어릴 때 엄마(문학적 소양)와 아빠(실험적인 정신)의 영향을 크게 받는다. 엄마는 미네소타 대학교에서 화학을 공부하기 시작했으나, 등록금 벌 만큼 베이비시터 일을 하려면 오후에 열리는 기나긴 실험 수업에 참여할 시간이 없어 중도 포기한다. 아이를 양육한 후 다시 미네소타 대학에 영문학 과정에 입학한다. 그때 저자는 중세영어사전을 찾아가며 엄마 공부에 참여한다. 그래서 이 책을 저술한 호프 자런의 문학적인 면을 접하게 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엄마는 책을 읽는 것도 일종의 노동이며, 각 문단마다 분투해야 한다고 가르쳤고, 나는 그런 식으로 어려운 책을 흡수하는 법을 배웠다.” (p.30) 어릴 때의 독서가 저자가 써야 하는 이야기와 과학 실험에 대한 논문 작성 등에 힘을 발휘하는 원동력이 된 것이라 볼 수 있다.
1951년 당시 대학은 남성들, 주로 돈이 있는 남성들, 적어도 어느 가정의 베이비시터가 아닌 다른 돈벌이가 있는 남성들을 위한 곳이었다. 여성 과학자들은 그 안에서조차 불공정한 편견과 맞서 싸워야 한다. 본능적으로 매순간 긴장하면서, 상대방에게 약점을 드러내지 않으려 주의하면서, 경계하면서 삶을 살아내는 그들이 가장 원하는 것은 평범한 운동장에 서보는 것이다. 일하는 여성이 처한 현실은 유리천장, 기울어진 운동장이었다. 온 힘을 다해 큰 나무와 같은 열정으로 과학자로 우뚝 선 저자가 훌륭해 보인다. 리타 콜웰, 샤론 버치 맥그레인의 『인생, 자기만의 실험실』에서도 이야기한다. 1963년 노벨물리학상을 받은 ‘마리아 마이어’는 연구생활 30년간 세 군데의 일류 대학에서 무보수로 자원봉사자로 일했고 결국 무급교수로 힘들게 활동했다. 남성은 동등한 자격을 갖춘 여성보다 더 유능하다고 간주하고, 저명한 남성 과학자 실험실에서는 젊은 남성 교수진을 선호한다. 모든 여성도 학교에서, 실험실에서, 일터에서, 승진에서 그리고 각자의 삶에서 동등한 대우를 받을 권리가 있다고 『인생, 자기만의 실험실』에서는 주장한다. 이런 의미에서 호프 자런은 어려운 환경 속에서 스스로 기회의 문을 향해 노력하고 열정적인 연구 정신을 꽃 피워낸다. 그런 꾸준한 노력과 불굴의 정신이 놀랍다.
저자는 실험 작업을 하고, 실험실을 운영하며 일하는 사람들을 관리하고 동료들과 소통하는 것을 좋아한다. 이는 어릴 때 아빠와 함께 한 실험실 생활의 영향이 크다. 아빠의 실험실에서는 원하는 만큼 모든 장난감을 가지고 놀 수 있고, 안전함을 느낄 수 있는 환경을 만나게 해주는 장소였다. 이렇게 자연적으로 흡수하는 방식으로 과학의 아름다운 부분을 이해해 간 것이다. 이렇게 소녀에서 과학자로 변해간다. 실험실의 모든 물건들은 그 존재 이유가 있다. 실험실은 손으로 하는 일에 모든 정신을 집중해서 뭔가를 해내는 곳이다. “과학을 선택한 것은 내가 필요로 하는 것을 줄 수 있고, 가장 기본적인 의미의 집, 다시 말해 안전함을 느끼는 장소를 내게 제공해준 것이 과학이었다.” (P.33)
호프 자런은 새로운 사고방식이 필요하다고 역설한다. 어쩌면 세상을 식물의 관점에서 보는 방법을 배워야 한다는 것이다. 식물의 입장이 되어보면 식물들이 어떻게 행동하는지를 이해할 수 있다고 한다. 저자는 우리가 원하는 세상에 식물이 존재하는 세상이 아니라 식물들의 세계에 우리가 존재한다는 생각에 기초한 환경 과학을 상상해보려고 노력한다. “세상의 모든 대단한 씨앗들처럼 나도 상황이 닥치면 그때그때 거기 맞는 해결책을 찾아가며 헤쳐나갈 수 있을 것이다.” (p.114) 식물과 우리가 다르다는 사실을 이해하기 시작해야 한다. 수십 년 동안 식물을 연구한 호프 자런도 결국 그들은 우리가 진정으로 이해할 수 없는 존재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들은 중대하고도 기초적인 면에서 우리와 다르다는 것이다.
“과학계를 이루는 작지만 살아 있는 부품으로서 나는 어둠 속에서 홀로 앉아 수없는 밤들을 지새웠다.” (p.398) 여성 과학자로서 솔직한 심정을 밝히는 이 책의 마무리 부분이다. 오랜 세월 탐색하며 연구한 소중한 사실들을 누구에겐가 이야기 하고 싶은 마음으로 쓴 글이기에 친근하게 다가온다. 기후 위기가 심각한 오늘날에 나무와 식물, 주변 환경을 한번 돌아보게 하는 멋진 책이라 생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