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보다 중요한 것
『모비 딕』 (황유원 옮김, 문학동네. 2023)은 미국 소설가 허먼 멜빌이 1851년에 발표한 소설이다. 1920년대의 이른바 ‘멜빌 부흥’을 거쳐 현재는 미국문학의 명작이자 세계문학의 걸작으로 당당히 평가받고 있다. 모비 딕이라는 이름의 흰 향유고래에게 한쪽 다리를 잃은 에이해브 선장이 피쿼드호의 선원들과 함께 그의 복수를 위해 항해하는 내용이다. 문학이 도달할 수 있는 무게와 깊이를 실감나게 풀어 쓴 문장들이 특징적이다. 작가 허먼 멜빌이 인생과 벌여왔을 사투와 그로써 쟁취해낸 진실이 내포되어 있다.
허먼 멜빌이 『모비 딕』을 발표한 19세기에는 고래잡이가 번성하던 때였다. 그 당시 선원들을 괴롭혀 온 거대하고도 흉포한 고래가 실제로 있었다고 한다. 고래잡이 선원들이 ‘모차 딕’이라고 부르던 이 고래는 에섹스호의 고래잡이 선원들이 새끼를 사로잡자 새끼를 구하기 위해 에섹스호를 공격해 침몰시켰다고 한다. 허먼 멜빌은 에섹스호의 일등 항해사 오웬 체이스가 쓴 『포경선 에섹스호의 놀랍고 비참한 침몰기』에서 영감을 얻어 작품을 구상했다.
허먼 멜빌은 1819년 뉴욕에서 태어났다. 1832년 아버지가 사업 실패 후 사망해 은행원, 점원, 교사, 상선의 사환 등 여러 직업을 전전한다. 1841년 포경선 선원으로 항해를 했으며, 1843년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한 첫 장편소설 『타이피』를 집필한다. 작가적 야심을 발휘한 작품등을 선보이나 평단과 독자 모두에게 외면당한다. 『선원, 빌리버드』를 미완으로 남긴 채 1891년 심장발작으로 생을 마감한다. 『모비 딕』은 생전에 빛을 발하지 못했지만, 그의 사후 극찬과 함께 미국문학의 걸작으로 손꼽힌다. 저서로 『레드 번 그의 첫 항해』, 『필경사 바틀비』, 『사기꾼 그의 가장무도회』, 『티몰레온』 등이 있다.
바다와 고래를 동경하던 이슈미얼은 고래잡이배를 타기로 마음먹고 뉴베드퍼드로 향한다. 그곳에서 식인 풍습을 가진 부족의 추장 아들 퀴퀘그를 만난다. 이슈미얼은 야만인 퀴퀘그의 인간성에 호감을 갖는다. 이슈미얼은 친구가 된 퀴퀘그와 함께 고래잡이배 피쿼드호의 선원이 되어 운명적인 항해에 나선다. 피쿼드호의 선장 에이해브는 머리가 흰 향유고래 모비 딕에게 한쪽 다리를 잃은 뒤 복수심에 불타 있다. 에이해브 선장은 모비 딕을 발견한 사람에게 금화를 주겠다며 선원들을 선동한다. 에이해브 선장은 일등 항해사 스타벅의 충고를 무시하고 모비 딕을 쫓아 인도양으로 태평양으로 항해를 계속한다. 마침내 모비 딕을 발견한 에이해브 선장과 선원들은 사흘 밤낮으로 모비 딕과 사투를 벌인다.
무엇보다 이 소설에서는 선장을 통해 삶에 대한 강한 의지 내지 목표지향적인 태도를 보여준다. 에이해브 선장의 복수심은 어려운 상황에 맞서서도 굴복하지 않는 한 인간의 강한 의지를 보여 주는 중요한 힘이 된다. 선장은 모비 딕을 죽여 없애 복수하는 길만이 인간으로서의 자존심을 회복하고 삶의 의미를 획득할 수 있다고 본다. 그는 끈기와 노력으로 자신의 생명보다 중요한 것, 목숨을 바쳐도 아깝지 않을 중요한 것이 있다고 믿고 행동한다. “송두리째 지나가버린 내 삶의 거센 파도여, 아득히 먼 대양의 끝에서 지금 이곳으로 밀려와 집채만한 파도와도 같은 나의 이 죽음을 더욱 높이 일게 해다오! 모든 것을 파괴하지만 정복하지는 못하는 고래여, 너를 향해 나는 힘차게 나아간다.” (p. 2권 510~511) 2018년 그레이엄 노튼쇼에 출연한 우사인 볼트가 자신이 일찍 은퇴한 이유에 대해 다음과 같이 밝혔다. “내가 하고 싶은 걸(올림픽 3연속 우승) 다 이뤘다. 더 이상의 목표가 없다.” 그럴지도 모른다. 삶에서 목표를 향한 동기 부여가 없으면 더 이상 노력할 힘이 생기지 않을 수 있다. 에이해브 선장의 복수심은 단순한 것이 아닌 삶에 대한 강한 의지를 표방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우리는 이제껏 한 번이라도 에이해브 선장처럼 무언가를 위해 목숨 걸고 달려든 적이 있었던가를 생각하게 한다.
『모비 딕』이 사랑받는 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다. 화자인 이슈미얼, 에이해브 선장, 스터벅, 퀴퀘그 등 생각할 거리를 던져 주는 여러 인물이 작품 속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고래 사냥과 항해에 참여하는 다양한 사람들의 삶이 생동감 넘치게 전개된다. “나를 이슈미얼로 불러달라.” (p.37) 로 시작하는 이 말은 <창세기> 성경에서 따온 것으로 ‘추방자, 사회에서 버려진 자’를 뜻하는 아랍인의 조상을 의미한다. 이는 저자가 주류인 기독교 사회에서 벗어난 중간자로서, 자본주의와 물질문명의 기독문명과 식민지 야만인들의 종교와 우상숭배 등 기타 문명조차 모두 객관적 시각으로 보고자 함을 의미한다. 그래서 퀴퀘그란 주요인물을 통해 문명과 야만의 차이는 무엇이고 믿음의 본질은 어디에 근거하는가 묻기도 한다.
특히 에이해브 선장과 스터벅의 대화가 이 소설의 주요 상징성을 대표한다. “말도 못 하는 멍청한 짐승에게 복수라뇨! 녀석은 맹목적인 본능에 따라 선장님을 공격했을 뿐입니다. 미친 짓이에요! 멍청한 짐승 때문에 격분하는 건 말이죠, 에이해브 선장님, 제게는 신성모독으로 보입니다.” (p. 1권310) 이에 에이해브 선장은 말한다. “ 삶에 벌어지는 모든 일들의 경우, 이성적인 무언가가 비이성적이라는 가면 뒤에서 자신의 얼굴이 새겨진 거푸집을 내미는 법이지. 그 가면인 벽을 뚫어야 해! 나에게는 흰 고래가 바로 그 벽이야. 나는 그 증오를 녀석에게 쏟아부을 거야. 신성모독 이라거나 태양이 날 모욕한다면 그 태양도 찔러줄 테니까.” (p. 1권 311) 허먼 멜빌은 등장인물을 통해 분노와 인간 사회의 욕망을 보여주고자 한다. 신과 인간에 대한 새로운 성찰로 선과 악에 대해 냉소적 입장을 암시하기도 한다.
『모비 딕』은 거대한 고래를 꿈꾸며 대양을 누비는 고래잡이 선원들의 이국적 생활과 선장 에이해브의 복수극과 더불어 식인종 출신의 선원등 뱃사람들의 남다른 애환을 그리고 있는 해양탐험 소설이다. 그러나 단순히 낭만주의적 바다탐험과 거대한 향유고래 포경업에 관한 소설만은 아니다. 이 소설은 19세기 당시 세계 최대의 포경업으로 미국 동부지역을 휩쓸던 부와 사치, 그리고 물질주의와 탐욕의 자본주의를 경계하는 면도 있다. 노예와 신분제도 및 신을 잃어버린 기독교 문명 사회의 썩고 비린내나는 현실을 여실히 드러내 주는 면도 내포하고 있다. “자네들 중 누구라도 하얀 고래를 발견한다면, 내가 그자에게 이 금화를 주겠다!” (p.1권 307), “복수에 성공한다고 해도 거기서 고래기름을 몇 통이나 얻을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낸터깃 시장에서 딱히 큰 소득을 안겨주지 못할 겁니다.” (p. 1권 310)
『모비 딕』은 작가 허먼 멜빌이 고래잡이배에서 일한 경험을 바탕으로 쓴 치밀하고 사실적인 묘사가 돋보이는 작품이다. 다양한 인간의 삶과 선과 악, 종교 등을 아우르는 풍부한 소재로 세월이 흐를수록 새로운 해석을 낳으며 명작의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이 소설은 오늘날에도 문학과 영화 등의 예술 분야는 물론 사회 전반에 폭넓은 영향력을 끼치고 있다. 우리에게 에이해브 선장처럼 목숨보다 중요한 무엇을 갖고 있는지를 생각하게 만든다. 삶을 활기차게 영위하기 위해 동기 부여를 심어주는 그 무엇을 찾아야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