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정한 삶과 지혜?
오늘을 사는 우리들의 상황과 그리 다르지 않는 고대 아테네의 상황을 담은 책이 있다. 플라톤의 『소크라테스의 변론』 ( 천병희 옮김, 숲, 2012)이다. 소크라테스가 기원전 399년 자신에게 제기된 고발사건에 대해 법정에서 스스로 변호하는 과정을 묘사한다.
플라톤(Platon 기원전 427~347)은 관념론 철학의 창시자로 소크라테스, 아리스토텔레스와 더불어 서양의 지적 전통을 확립한 철학자이다. 플라톤 집안은 비교적 상류계급이었고, 그런 배경으로 정계 진출을 꿈꾸었다. 하지만 믿고 따르던 스승 소크라테스의 죽음을 보고, 큰 충격을 받고 정계 진출의 꿈은 접는다. 이집트, 남이탈리아, 시칠리아 등 해외 여행에서 돌아온 그는 대학의 원조라고 할 수 있는 아카데메이아(Akademeia)를 개설해 아리스토텔레스 같은 철학자들을 배출한다. 저서로는 『크리톤』, 『프로타고라스』, 『메논』, 『파이든』, 『향연』, 『국가』, 『법률』 등을 남겼다.
『소크라테스의 변론』은 재판의 전개에 따라 크게 최초의 변론, 유죄선고 후의 변론, 사형선고 후의 변론으로 이루어져 있다. 사론(邪論)을 정론(正論)으로 만든다는 자신에 대한 초기의 고발에 대해 먼저 변론한다. 그리고 나라에서 섬기는 신들이 아닌 다른 신을 섬기며 청년들을 타락시킨다는 멜레토스외 2인의 고발에 대해 변론을 진행한다. 소크라테스는 유죄선고를 받고 사형을 선고하자, 최후진술을 통하여 죽는 한이 있어도 내 태도를 바꾸지 않을 것이라 강변한다.
소크라테스의 법정에서 자기변호 논증 제시는 확고하다. 델포이의 신탁이 믿기지 않아 현자라 불리는 정치가, 시인, 수공업자 등을 찾아다닌다. 하지만 그들 중 어느 누구도 소크라테스의 질문에 끝까지 답하지 못하고, 사실은 무지하다는 것을 드러낸다. 결국 소크라테스는 자신이 모르고 있음을 알고 있기에 신탁을 받게 되었다는 것을 깨닫는다. “모르는 것을 안다고 생각하는 그런 무지야말로 가장 비난받아 마땅한 무지가 아니겠습니까? (p.48)
소크라테스는 자기를 불경죄로 고발한 멜레토스를 불러내어 대화술로 그의 고발이 악의적인 허구임을 밝혀낸다. “신들을 믿지 않으며 새로운 신적 존재들을 들여와서 젊은이들을 타락시킨다.”(p.35)는 기소내용에 대해 적극적으로 반박한다. 즉 소크라테스는 국가의 종교행사나 종교제전에 빠짐없이 참가했으며, 젊은이들을 타락시키는 대신 바르게 교육하고자 애썼다고 강변한다. 진실의 목소리를 전달하는 것은 그때나 지금이나 험난한 길일 수밖에 없는가?
또한 대화편 말미의 사형선고 후 최후 변론 부분에서 죽음을 추호도 두려워하지 않음을 보여준다. 그는 영혼의 강한 힘을 보여준다. 더 이상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더 나음을 깨닫고, 나약해지지 않았으며 기꺼이 죽음을 받아들였고 최후를 맞이하는 태도를 보인다. 소크라테스는 죽음이란 꿈꾸지 않는 잠이거나 진정한 정의가 지배하는 곳으로 떠나는 여행이고, 그곳에 가면 호메로스나 헤시오도스 같은 선현들과 대화할 수 있으니 얼마나 좋은 일이냐며 오히려 주위분들을 위로한다. “이제 떠날 시간이 되었습니다. 나는 죽으러 가고, 여러분은 살러 갈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중 어느 쪽이 더 나은 운명을 향해 가는지는 신 말고는 아무도 모릅니다.” (p.76) 소크라테스의 죽음은 한 철학자의 일생에 걸친 철학적 작업에 대한 당대 사람들의 그런 몰지각과 부질없는 시기심과 이기적인 적대심이 빚은 어이없는 결말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인간으로서 명성이나 재물이 아닌 훌륭한 미덕(arete)을 취하고, 끊임없이 반성하며 살아가는 것이 소크라테스 철학의 요체이다. 그래서 죽음 앞에서도 그의 말과 행동은 두려울 것이 없다. 물질적인 부와 명예에 눈이 멀어 내면의 가치와 삶의 진실을 외면하면서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소크라테스의 외침은 여전히 유효하다. “대화하는 것이야말로 인간에게 최고선이며, 캐묻지 않는 삶은 인간에게 살 가치가 없다고 말한다.” (p.67) 플라톤의 『소크라테스의 변론』은 오늘 우리에게 생생하게 다가와 진정한 삶과 지혜란 무엇인지 질문을 던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