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속 개인
대구 김종협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여워 말라.” 19세기 초반 러시아 시인 푸시킨의 글귀이다. 누구나 한번 쯤은 되내기며 위안과 격려를 받았을 시이다. 푸시킨은 국민적 시인이며, 전 인류적 시인이라 할 만하다. 특정 장르에 구애받지 않고 자유롭게 창작하며 인간 삶의 본질을 성찰하는 역사적인 소설이 있다. 알렉산드르 세르게예비치 푸시킨의 『대위의 딸』 (펭귄클래식 코리아, 2009)이 그것이다. 역사라는 거대한 사건의 한복판에서 살아가는 개개인의 평범하고 진솔한 삶의 이야기를 거짓 없이 생생하게 전하고 있다.
푸시킨은 1799년 모스크바에서 태어났다. 유년 시절 왕실귀족학교 리체이에서 교육을 받으며 시인으로서의 재능을 다졌다. 새로운 사상과 문학 양식에 눈을 뜨며 정치색 짙은 시들을 창작하여 검열당국에 의해 러시아 남부로 유배되기도 한다. 암울한 상황에서도 창작열은 식지 않아서 『예브게니 오네긴』, 『고 이반 페트로비치 벨킨의 이야기』를 쓰는 창작의 성숙기를 맞는다. 1831년 이후에는 역사에 관심을 갖고 우랄 지방을 여행하며 푸가쵸프 반란에 관한 연구를 한다. 그 성과물이 1834년 『푸가쵸프사』 제목으로 발표된다. 하지만 아내에 대한 염문 때문에 단테스와의 결투로 복부에 치명상을 입고 38세의 나이로 사망한다.
주인공인 표트르 안드레이치는 귀족 집안에서 귀하게 자라 철들지 않은 도련님이다. 전방에 나가 어른이 되어 오라는 아버지의 명령에 따라 장교 생활의 길을 떠난다. 근무지로 가는 도중에는 온실 속의 화초처럼 자란 도련님답게 어리석은 행동을 한다. 하지만 사랑하는 여인인 마리야 이바노브나를 만나고 반란군과의 결투, 푸가쵸프와의 관계등을 경험한다. 한심스러워 보였던 주인공이 사랑하는 여인을 지켜내기 위해 용기를 내고 자신의 신념을 지켜가는 과정이 묘사된다.
『대위의 딸』이 스토리만 보면 재미있고 행복한 결말로 이어지는 마치 동화와 같아 보인다. 하지만 푸시킨의 삶과 시대 상황을 파악하지 않고서는 작가 말하고자 하는 것을 찾아내기가 어렵다. 작품의 행간에 교묘하게 숨겨져 있는 작가의 예술적 기획(의도)을 알아야만 작품을 이해한다 하겠다. 그 만큼 쉽지 않은 소설이다.-그래서 뒷 부분의 주석이 도움을 준다.
먼저 이 소설은 푸시킨의 역사주의적 관점이 대표적으로 나타난다. 러시아의 역사와 민중의 삶에 대한 진지한 관심이 드러난다. 당시 부패한 귀족 생활을 비판하고, 민중 봉기의 양상을 보여주며 반란의 사회적 원인이 어디에 있는지를 잘 보여주는 제6장 푸카쵸프의 난이 그것이다. 역사를 소재로 전개되는 일련의 이야기들에는 조국과 민중을 향한 사랑, 억압받는 민족을 향한 연민이 깔려있다. 역사와 민중에 대한 작가 푸시킨의 진지한 탐색과 역사의 진실에 도달코자 하는 노력은 의미있게 다가온다. “폭도들은 길거리로 우리를 끌고 다녔다. 주민들은 그들을 맞이하기 위해 빵과 소금을 들고 집에서 나왔다.” (p.90) "농부들의 아들아, 잘했도다. 짐이 보답으로 상을 내리겠노라. 들판 한 가운데 높이 세운 나무집.“ (p.102)
『대위의 딸』 소설 후반부는 무기력한 개인으로서 역사 권력 앞에 매몰되지 않고, 개인 의식의 성장과 성숙을 강조한다. 두 주인공의 운명은 역사 앞에서 스스로 성장의 과정을 겪고 진정한 승리를 얻어낸다. 푸시킨이 생각하는 성장하는 인간이란 내면의 목소리에 귀 기울려 무한한 가능성을 실현해 나가는 인간이다. 푸시킨은 두 주인공(그리뇨프와 마샤)을 통해서 작가가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진정한 인간상을 그려 보이고자 한 것이라 여겨진다. 작가는 실제 삶에서 아내 문제로 결투를 했듯이, 소설 속에서도 마리야 이바노브나 때문에 시바브린과 결투를 하여 다치기도 한다. 모순으로 가득한 현실을 직시하며 작가는 자신만의 조화로운 예술세계를 드러내는 창작의 작업을 구현한 것이라 볼 수 있다. “조국에 힘을 보탤 수 있는 곳에서 근무하는 것이 진정한 군인의 의무다 ······.그러나 사랑은 내게 마리야 이바노브나 곁에 머물면서 그녀를 지키고 보호하라고 강력히 충고한다.” (p.99)
당시는 전제정치와 농노제도가 위세를 떨치던 시기였다. 푸시킨은 자신의 억압받은 삶으로부터 외치는 자유를 시와 소설을 통한 작품으로 표현한다. 그의 자유는 인간 존재의 본질적 요구에 의한 것이다. 즉 인간 최고의 가치로서 보편적 휴머니즘이었다. 지금 우리나라에서 진행되고 있는 대통령 선거를 앞 둔 시기에서 역사와 정치에 대해 생각해 보게 하는 책이다. 또한 개개인의 진실한 삶을 돌아보게끔 과제를 던져주는 소설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