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를 원하면 평화를 준비하라
현대를 사는 우리에게 올바른 현대사 사건들에 관해 재조명 해보는데 도움을 주는 책이 있다. 이동기 강릉원주대 사학과 교수의 『현대사 몽타주』 (돌베개, 2018)가 그것이다. 폭력과 전쟁의 시대, 혁명과 평화를 꿈꾼 대안의 시대를 다루는 현대사의 시간과 기억들을 교차시키는 역사 몽타주이다. 세계현대사의 주요 사건에서 역사 인식의 관점을 확대하고 현실 비판의 과제를 던져주는 책이다.
이 책은 1부 전쟁과 혁명, 2부 폭력과 책임, 3부 냉전과 평화, 4부 대안과 전망, 그리고 5부 기억과 전승으로 전개된다. 저자는 현대사 전공자로서 현대사가 역사학과 인문학에서 매우 특별한 지위와 역할을 지니고 있다고 주장한다. 역사 에세이로서의 이 책은 과거와 현재, 서양과 한국, 역사와 기억의 ‘몽타주(조합)’를 통해 현대사 비평을 실험한다. 즉 책의 부제 ‘발견과 전복의 역사’에서 그 의미를 파악해 볼 수 있다. “현실 비판을 통해 새로운 역사와 그 의미를 ‘발견’하고, 확장된 역사 인식을 통해 인습적인 지적 담론을 ‘전복’하며, 다시 현실 비판의 관점을 확대하는 비판의 상호작용을 실험한다.”(p. 9)
서양사 연구자인 저자의 눈에는 역사란 성공적인 진보의 증거가 아니라 잔혹한 실패로 얼룩진 반면교사인, 20세기 현대사는 곧 폭력사로 본다. 1945년 5월 8일은 유럽에서 2차 세계대전이 끝난 날이다. 동시에 독일 여성에 대한 미ㆍ소ㆍ영ㆍ프 4개 전승국 군인의 성폭행이 시작된 날이기도 하다. 패전국이었던 독일에서는 종전 뒤 무려 86만 명에 이르는 여성이 성폭력 피해를 당했다. 소련군에 의한 피해 여성이 약 50만 명이었고, 미군에게 성폭력을 당한 여성도 19만 명 안팎으로 추정된다. 이렇듯 세계대전은 유럽 열강의 구조적 대립과 갈등의 산물이었다는 게 기존의 평가이다. 하지만 저자는 “이런 식의 역사 이해는 당시 행위자들의 전쟁 정당화 논거를 그대로 받아들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비판한다. 그런 요인도 있지만, 그보다 더 직접적인 원인은 전쟁 회피 노력을 게을리한 각국 지도자의 우유부단과 무능력이라고 지적한다.
이 책은 그동안 승자의 역사 입장에서 숨겨져 왔던 사회적 약자와 피해자들의 생생한 목소리를 담은 연구들을 대거 포함시킨 점이 눈길을 끈다.
『현대사 몽타주』에서 저자는 스스로 평화사에 주된 관심을 두고 있다. 3부 제5장에서 저자는 “평화를 원하면 평화를 준비하라.(원평비평願平備)” (p.255)라는 준칙을 내세워 평화를 지속 가능케 하는 요인들을 찾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1980년대 유럽 평화 운동은 안보관의 근본적 전환과 평화의식 형성에 큰 영향을 주었다.(‘1983년 서독 본에서 열린 핵 재무장 결정 반대 시위’, p.254) 평화정치와 평화문화의 정착과 확신만이 개인과 집단의 안전을 궁극적으로 보장하는 21세기 문명사회의 요청이자 숙명이라고 저자는 주장한다. 특히 한반도의 제주 강정 해군기지, 경북 성주 사드 배치에 맞서는 ‘대중의 평화운동’이 질기게 이어져야 한다고 설명한다. “먼저 선제적으로 하자” 먼저 평화도시를 선포하고, 먼저 평화연구소를 만들고, 먼저 평화 축제를 하자고 저자는 주장한다. “멍텅구리들이 전쟁을 준비할 최적의 땅을 찾기 전에 우리가 먼저 한반도 곳곳에서 ‘평화를 준비’하는 것은 어떨까?”(p.259)
그리고 후반부 5부에서는 1919년 건국론, 1948년 건국론 논쟁, 위안부 소녀상과 우후죽순 난립하는 역사박물관에 관해서도 좀더 면밀하게 따져볼 것을 제안한다. 현대사는 여전히 해석의 지평이 열려있고, 재해석과 수정이 끊임없이 이루어질 수밖에 없는 첨예한 분야이다. 기존의 정설과 해석을 수정할 수 있는 사실이 발견되면 끊임없이 새롭게 쓰이는 것이 현대사의 책임이라 저자는 주장하는 것 같다. 수많은 사례와 폭넓은 사건들을 다루면서 우리에게 ‘역사란 무엇인가?’라고 성찰하게끔 묻는 현대사의 좋은 에세이라 할 만한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