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성의 본질
대구 김종협
조르바가 빛날 수 있었던 것은 작가 카잔차키스의 힘이다. 카잔차키스를 닮은 서술자가 그와 대비를 이루면서 풀어낸 작품이 『그리스인 조르바』이다. “현재적이고 실물적고 집중적인 삶을 살다 간 멋진 인간! 나에게 롤 모델이 있다면 바로 조르바일 것이다.”라 감탄한 화자의 말들이 셍각난다. 여기 서보 머그더를 닮은 서술자가 있고, 조르바를 연상케하는 주인공 에메렌츠의 인생 그 자체를 깊이 있게 다룬 소설이 있다. 서보 머그더의 『도어』 (김보국 옮김, 프시케의 숲, 2019)가 그것이다.
서보 머그더는 헝가리를 대표하는 소설가, 시인이다. 헝가리 동부 데브레첸의 개신교 집안에서 태어났다. 코슈트 러요시 대학을 졸업 후 교사로 재직했으며 교육부에서도 근무했다. 정치적인 이유로 공무원 신분을 잃게 되었다가 1956년 헝가리 혁명 이후 출판금지령에서 해제된다. 저서로는 시집 『인간으로서의 회귀』, 『프레스코』, 『사슴』, 『옛 우물』 등이 있다.
헝가리 부다페스트를 배경으로 저명한 작가인 화자와 20년간 화자의 집안일을 돌봐준 가정부 에메렌츠와의 관계를 그린다. 에메렌츠는 자신만의 방식대로 집안일을 해나가는 까다로운 가정부이다. 그녀는 특유의 에너지로 이들 부부의 삶에 들어와 믿음직스러운 존재가 된다. 두 번의 세계대전을 겪어내고 부모님을 잃은 뒤 어려서부터 남의 집 하녀 일을 한다. 그렇지만 에메렌츠는 강인한 생명력으로 주변 사람들과 고양이, 개를 돌본다.
저자는 인간의 존엄에 대해 말하고자 한다. 사람은 결국 각자의 처지에서 세상을 바라보고 행동한다. 이것은 소통을 가로 막는 일이다.
에메렌츠의 괴팍함과 비밀스러움의 원천은 단 한번도 타인의 출입을 허용하지않는 문이다. 에메렌츠는 화자인 나를 유일하게 믿고 문을 열어준다. 바로 나에 의해 에메렌츠가 마지막까지 지키고자 했던 비밀은 만천하에 까발려지고 망가진다. 제목이기도 한 도어(문)을 통해 화자는 깨닫는다. 무엇을 인간의 존엄을... “에메렌츠는 우리들 앞에서 인간적 존엄이 산산조각 난 채 오물 속에 널브러져 있다. 당신은 그녀의 비밀들과 함께 넘긴 거예요. 당신은 유다예요. 그녀를 배신한 거예요.” (p.308)
노동의 진실함을 강조한다. 에메렌츠는 반지성주의자에 냉소적인 사람이다. 히틀러도 왕조도 공산당도 의사도 교회도 똑같이 신뢰하지 않는다. 오직 몸으로 하는 노동의 진실함만을 굳게 믿는다. 노동이 에메렌츠를 살아가게끔 하는 원동력이다. 타인을 절대 들이지 않는 자신의 집에 갈 곳 없는 개와 고양이을 돌본다. 형편이 어려운 이웃들에게 아낌없이 정을 베푼다. 눈이 오면 모든 이웃집들과 거리를 빗자루를 들고 청소한다. 노동에서 기쁨을 느꼈고, 노동을 즐겨워 하며, 기예에 가까울 정도로 육체적으로 힘든 일을 거뜬히 처리해 낸다. “에메렌츠는 마르크스를 알지도 못했고 신문도, 그 어떤 책도 읽지 않았는데도, 내 생각으로는 마치 만성적인 노동 기피자를 대하듯 우리들도 낮춰보았다.(p.150), "에메렌츠의 세상에는 빗자루질을 하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 이렇게 두 부류의 사람들이 있다." (p.154) 『그리스인 조르바』의 조르바의 삶에 대한 태도와 닮아 있다. 먹물 냄새 풍기는 추상적인 명제가 아니라 땀 냄새 물씬 풍기는 구체적인 태도의 조르바 삶과 상통한다.
양립하기 어려워 보이는 특징을 간직한 화자와 에메렌츠의 두 인물를 대비시키면서 전개하는 서사가 놀랍다.
작년 초에 읽은 산도르 마라이의 『열정』도 헝가리 작가의 작품이었는데, 41년 만에 만난 두 친구의 사랑과 증오에 대한 회상이 독특하다 여겼던 생각이 난다.
같은 헝가리 작가 서보 머그더는 『도어』를 발표하면서 헝가리의 국민작가의 반열에 오른다. 또한 2015년 뉴욕타임스 ‘올해 최고의 책’으로 선정되면서 세계적인 사랑을 받았다. 헝가리 근현대사를 배경으로 독특한 여성 인물을 그려낸 작품으로 주인공 에메렌츠를 통해 인생 그 자체의 깊이를 알아가게 한다. 한 인간이 다른 인간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걸리는 시간이 20년이 필요할까? 열정적인 헌신자이기도 하고, 존경과 연민을 동시에 불러일으키는 주인공을 통해 인간성의 본질은 무엇인지 생각하게끔 하는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