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력
대구 김종협
예전에 문학길 탐방으로 독서모임에서 회원들과 함께 경남 통영에 간 적이 있다. 통영 <세병관>에서 읽고 온 박경리의 『김약국의 딸들』을 갖고 토론을 했다. 그땐 책에 대한 서사적인 줄거리의 위주로 말하고, 김약국 가족의 비극적인 삶에 비통해한 경험이 있다. 지금 박경리의 대하소설인 『토지』를 천천히 읽고 있는 중에, 다시 박경리의 『김약국의 딸들』 ( 마로니에북스, 2015 )을 읽어 본다.
박경리는 1926년 경상남도 통영에서 태어났다. 1955년 김동리의 추천을 받아 단편 『계산』으로 등단했다. 사회와 현실에 대한 비판성이 강한 문제작을 잇달아 발표하며 문단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구한말에서 일제강점기를 거쳐 해방에 이르기까지 무수한 역사적 사건과 민중들의 삶을 그린 『토지』는 문학사의 기념비적인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다. 저서로는 『파시』, 『시장과 전장』, 『원주통신』, 『만리장성의 나라』, 『꿈꾸는 자가 창조한다』 등이 있다.
김약국은 고아로 자랐다. 어머니는 비상 먹고 자살을 하고 아버지는 살인을 하고 어디서 돌아갔는지 아무도 모른다. 김약국은 딸을 다섯 두었다. 큰딸은 과부이고 영아 살해혐의로 경찰서까지 다녀왔다. 둘째인 용빈은 노처녀이다. 셋째는 집에서 키운 머슴을 사랑했다. 허용되지 못했던 머슴과의 불륜 때문에 아편쟁이 부자 아들에게 시집을 갔다. 결국 그 아편쟁이 남편은 장모와 그 머슴을 도끼로 살해한다. 넷째는 시아버지와 불미스런 일로 남편을 찾아 부산으로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배의 침몰로 사망한다.
이 소설의 공간 배경인 〈통영〉이 상징하는 바는 무엇인가? 이 작품에서의 통영은 향수병을 불러일으키거나 즐거운 경험이 남아있는 고향의 개념은 아니다. 산업의 발달로 인해 배금주의가 만연하여 도덕적으로 타락한 장소이다. “투기적인 일확천금의 꿈이 횡행하여 경제적 지배계급은 부단한 변동을 보였다. 봉건제도가 일찍 무너지고 활동의 자유, 배금사상이 보급된 것만은 사실이다.” (p.10) 그리고 아직까지 주술적 예언과 기독교 신앙이 공존하는 운명에 사로잡힌 장소이다. 그래서 여성으로서는 치명적인 성추문이 끊이지 않는 억압적이고 감옥 같은 장소이기도 하다. 즉 통영은 근원적인 장소이자 존재의 근원이라는 즐거운 추억의 장소라기보다는 운명을 벗어날 수 없는 저주와 고역의 장소이다. “비상 묵은 자손은 지리지(번식) 않는다는데 성수도 사람 구실 못할까 봐, 남이 가라 캐도 피할 건데, 와 자꾸 그 집에 가는지.” (p.36) 샤머니즘적인 주술적 예언이 담겨있다.
『김약국의 딸들』에서 저자가 보여주고 싶은 것은 우리의 일상적인 삶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비극에 대한 인식의 문제를 다룬다. 이 작품은 김약국 집안의 비극적인 목적만으로는 끝나지 않는다. 비극의 파고가 지나간 지점에서 회생을 위한 새로운 움직임이 싹트고 있기 때문이다. 저자는 용빈이라는 인물을 통해서 비극의 극복 가능성을 열어놓고 있다. 그것이 용빈에게는 이성과 지성의 힘으로 강인한 생명력으로 나타나고 있다. 박경리는 어떤 역경 속에서도 포기하지 않는 끈질긴 생명력을 강조하고자 한다. 그렇기 때문에 『김약국의 딸들』은 비극이 파멸과 좌절의 종착역이 아니라 처절한 폐허속에서도 솟아나는 생명력의 자긍심을 보여준다. 이것은 한 집안의 몰락이라는 비극을 우리에게 던져주는 것이 아니라 끝없는 죽음의 위협 속에 살고 있는 우리에게 견디고 버티게 하는 한 줄기 희망을 제공해 준다. “인생이란 사철이 봄일 수는 없잖아? 가을이 오면 잎이 떨어지고 한겨울이 오면 헐벗고 떨어야 하지만, 이내 봄이 오지 않니? 희망을 잃어서는 안 돼요.” (p.231) "봄이 멀지 않았는데, 바람은 살을 에일 듯 차다.“(p.415)
『김약국의 딸들』은 통영에서 대를 이어 관약국을 하던 김약국 집안의 비극적인 삶의 이야기이다. 하지만 작품 속을 관찰해보면 여성 개인의 삶과 함께 새로운 교육을 받은 지식인의 갈등이라든가 사회변동에 따른 경제적 지배의 새로운 양상도 보여준다. 유교적 질서가 지배하는 사회에 있어서 여자의 숙명이 비극을 잉태함으로써 한 가족의 파탄을 이야기하는 점도 분명히 있다. 하지만 한약방을 경영하던 김약국이 어장이나 어선에 투자를 하는 행위는 변동하는 사회 속에 발을 들여 놓고 있음을 이야기한다. 즉 봉건시대의 가치관과 제도의 붕괴를 상징적으로 드러내 주고 있다. 깊이 파고 들면 들수록 더 의미 있고 끈질긴 생명력이 느껴지는 책이다. 『김약국의 딸들』는 저자가 1962년인 36세에 발표한 작품이다. 박경리의 문학적인 사상을 알고 싶다면 1969년부터 1994년까지 26년 동안 집필한 『토지』를 만나보는 것도 더할 나위 없는 행운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