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안감
“사랑이 어떻게 너에게로 왔는가?/햇빛처럼 꽃보라처럼 왔는가,/혹은 기도처럼 왔는가?/행복이 반짝거리며 하늘에서 풀려와/날개를 접고 커다랗게 걸쳐졌었지/꽃피는 나의 가슴에…” 릴케의 시 <사랑>중 일부분이다. 시인 중의 시인 릴케는 수많은 훌륭한 시들을 발표했다. 시하면 릴케를 떠올리는 이유이기도 하다. 이 위대한 작가 릴케의 『말테의 수기』 (문현미 옮김, 민음사, 2022)는 릴케가 파리 생활에서 경험한 고독과 절망을 바탕으로 쓴 소설이다. 이 소설에는 파리라는 대도시를 경험하며 느끼는 무의미한 것, 빈곤과 공포의 분위기를 고스란히 담고 있다. 개개인의 자유로운 삶이나 존엄은 아랑곳없고, 대도시의 어두움과 죽음의 그림자가 존재하는 인간상을 그리고 있다.
라이너 마리아 릴케는1875년 오스트리아 제국에 속한 체코의 프라하에서 태어났다. 일곱 살 때까지 어머니의 취향에 의해 여자 아이로 길러지다가 1886년 아버지에 의해 육군학교에 입학한다. 참담한 시기를 거친 이 시절에 처음으로 시를 쓰기 시작한다. 두 번에 걸친 러시아 여행과 스위스, 이탈리아 여행에서 깊은 정신적 영감을 얻어 『기도시집』을 완성한다. 1차 세계 대전 체험, 아프리카와 스페인 등지로의 여행은 릴케 만년의 역작인 『두이노의 비가』에 녹아들어 있다. 저서로 『형상시집』, 『신시집』, 『오르페우스에게 바치는 소네트』, 『로댕론』, 『과수원』 등이 있다.
주인공 말테는 부모을 잃고 가족 하나 없는 고독한 28세의 시인이다. 그는 생계를 위하여 고향인 덴마크를 떠나 파리로 간다. 말테가 떠올리는 유년 시절은 유서 깊은 가문의 저택 속에서 외부와 차단된 채 자라는 유약하고 예민한 소년의 모습이다. 그 시절 말테는 곧잘 열병을 앓았으며, 벽에서 커다란 손이 나타나는 환각을 보곤 한다. 청년이 된 지금도 환각과 강박 관념에 시달리며 늘 불안해한다. 그는 시인으로 사명감을 느끼며 보는 방법을 배우기 위해 늘 파리 시내를 홀로 다닌다.
릴케의 작품을 이해하려면 그의 삶과 많은 작가들과 예술가들의 만남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릴케는 수많은 작가와 예술가들을 교우하지만, 특히 살로메와 로댕과의 만남은 빼놓을 수 없다. 뭔헨에서 릴케는 자신보다 열네 살 위인 살로메를 만난다. 그녀는 릴케 속에 잠재한 시인의 자질을 일깨울 수 있도록 도와준다. 릴케는 살로메와 함께 그녀의 고향인 러시아로 두 번이나 여행을 떠난다. 그곳에서 톨스토이를 만나 깊은 감명을 받기도 한다. 릴케는 클라라 베스토프라는 여성 조각가와 결혼하는데, 그녀는 로댕의 제자였다. 릴케는 1902년부터 로댕의 집에서 기거하며 개인 비서로 일하면서 대가의 일거수일투족을 관찰하고 메모한다. 로댕이 돌에 모든 것을 새긴 것처럼 릴케는 『신시집』의 언어에 모든 것을 담아 내려고 노력한다. 사물의 본질을 정확하게 파악해 세밀하게 표현하는 언어적 조각품을 창조하려 힘쓴 것이다.
『말테의 수기』는 말테라는 주인공을 통해 어린 시절 불행했던 기억과 파리 체류 시절의 불안감을 극복하려는 시도를 한다. 릴케 자신이 작품의 공간적 배경인 파리에서 실제로 사는 동안 품고 있었던 내면의 상념이 드러난다. “나는 오히려 사람들이 여기서 죽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거리의 곳곳에서 요오드포름 냄새, 감자튀김의 기름 냄새, 불안의 냄새가 나기 시작했다.” (p.10) 말테의 회상을 통해서 그 당시에는 충분히 극복하지 못한 불행한 기억과 공포를 반복적으로 체험함으로써 극복하려 노력한다. 저자는 말테의 기억을 통해 그 시절을 찬찬히 되짚어 그려 보면서 불안에서 벗어나려는 시도를 한다. 주인공 말테와 더불어 릴케 자신도 이 소설에서 그런 끔찍했던 시절에 대한 회상 속에서 사실은 자기 내면의 상처를 치료할 길을 찾고 있는 것이다. 물론 작품 속에서는 모든 것에 대한 회의와 비판적인 시각이 존재하지만 그래도 저자는 표면적인 비판적 서술과는 정반대의 길인 극복의 힘을 보여주고자 한다. “모든 게 지금까지보다 더 내면 깊숙이 파고들어 과거에는 항상 끝났던 곳에 이제 머물러 있지 않는다. 옛날에는 알지 못했던 깊은 내면이 생겼다.” (p. 11~12)
이 작품은 일반적인 소설과는 다르게 서사적인 줄거리가 없다. 『말테의 수기』라는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일기 형식의 글이다. 짤막한 글이나 편지, 그 밖에 여러 상념들이 각각의 단락을 이루며 나열되어 전개된다.. 릴케는 이 소설을 1904년에 로마에서 쓰기 시작하여 1910년 라이프치히에서 완성한다. 이 작품의 감각적이고 실존적인 산문은 훗날 릴케의 시 창작에 많은 영향을 끼친다. 『말테의 수기』는 형식상으로도 독특하지만, 릴케의 작품 세계를 이해하기란 쉽지 않다. 하지만 천천히 읽으며 들여다보면 릴케의 예술적인 창의성과 아름다운 영혼을 만나게 된다. 백혈병이 악화되자 죽음을 인지하고 묘비명을 직접 유서로 남긴 그의 글귀가 릴케의 창작 세계를 대변해 준다.
“장미여, 오 순수한 모순이여./ 그 많은 눈까풀 아래 누구의 잠도 아니려는/ 욕망이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