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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by 글 쓰기 2024. 6.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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긍정적인 삶

 

 

프리드리히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장희창 옮김, 민음사, 2018)는 우리 삶의 해설서라할 만큼 위대한 책이다. 니체는 디오니소스적 긍정을 설파한 철학자이다. 우리의 삶과 지금의 내 모습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그것을 긍정할 것을 주문한다. “운명을 사랑하라(Amor fati) 이것은 이제부터 나의 사랑이 될 것이다. 나는 언젠가 긍정을 말하는 자가 될 것이다!” 니체는 현존의 긍정을 말하면서 더 나은 존재를 향해 끝없이 자신을 창조해가는 과정으로서의 지금 내 모습을 사랑하라고 강조한다.

 

 

 

프리드리히 니체는 1844년 프로이센의 뢰켄에서 태어났다. 14살에 슐포르타 기숙학교에서 엄격한 고전 교육을 받고, 1864년 본 대학에서 신학과 고전 문헌학을 공부했다. 쇼펜하우어의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를 읽고 감명을 받았으며, 바그너를 알게 되어 그의 음악에 심취했다. 스물여덟 살에 처녀작 비극의 탄생를 펴냈다. 저서로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즐거운 학문, 우상의 황혼, 선악의 저편, 힘의 의지등이 있다.

 

 

 

차라투스트라는 30살에 고향을 떠나 산으로 들어간다. 산 속 동굴에서 10년간 고독을 즐기다가, 어느날 그는 자신의 넘쳐흐르는 지혜를 사람들에게 나누어주고자 산을 내려온다. 산을 내려와서 첫번째로 만난 사람은 숲 속의 성자였다. 성자와 헤어지면서 이런 말을 내뱉었다. "이 늙은 성자는 숲속에 있어서, 신이 죽었다는 것을 아직도 듣지 못했구나!" 성자와 헤어진 차라투스트라는 가까운 도시에 들어선다. 그곳 시장에는 줄타기 곡예사의 공연을 보기 위해 많은 군중들이 모여 있었다. 차라투스트라는 군중들에게 자신의 넘쳐흐르는 지혜의 가르침에 대해서 말해보지만, 군중들은 줄타기 공연에만 관심을 가질 뿐이었다. 그는 인간 내면의 모든 사막을 목격하고 다시 산으로 올라간다. 그리고 왕들과 거머리와 마술사, 추악한 자, 거지, 그림자, 나귀와 대화하고 축제를 벌인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는 차라투스트라를 통해 힘에의 의지 사상을 강조한다. 존재하는 것은 하나같이 힘을 향한 의지를 갖고 있다는 것이다. 니체는 존재하는 것은 단순한 존재에 만족하지 않고 더 많은 힘을 얻기 위해 분투한다고 말한다. 니체는 이 힘에의 의지를 만물의 존재 원리로 받아들여 신성시했다. “나는 생명 넘치는 자를 발견할 때마다 힘의 의지를 발견했다. 그리고 시중드는 자의 의지에서도 주인이 되려는 의지를 발견했다. 보라, 나는 언제나 자기 자신을 극복해야 하는 그 무엇이다.” (p.201) 내가 무엇을 창조하든, 내가 그것을 얼마나 사랑하든 내 의지가 그것을 원해야 한다는 것이다. 살아 있는 자에게 있어서는 삶 그 자체보다는 다른 많은 것이 더 높이 평가되고, 이러한 평가를 통해서 길러지는 것이 바로 힘의 의지라는 것이다. 니체는 창조적 정신에 의해서 지금까지의 문명의 가치를 해체하고 힘에의 의지라는 새로운 긍정적 가치를 창조해야 한다고 역설한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영원회귀는 처음부터 끝까지 꿰뚫고 있는 니체의 우주론이다. 니체는 가능한 것은 에너지의 끝없는 운동에 의해 촉발되는 만물의 영원한 이합집산뿐이다라고 말한다. 이렇게 하여 모든 것은 영원히 제자리로 돌아오게 된다. 독수리의 목을 감고 있는 뱀과 반지 등에 의해 상징화되고 있는 것도 이 사상이다. “모든 순간에 존재는 시작한다. 모든 여기를 중심으로 저기라는 공이 회전한다. 존재의 둥근 고리는 영원히 자기 자신에게 충실하다. ” (p.383), ", 차라투스트라여, 그대는 영원회귀의 교사다. 이것이 이제 그대의 운명이다!“ (p.387) 모든 생에 적대적인 형이상학적 가식을 버리고 사실 그대로의 삶을 긍정하며 살아가기를 니체는 요구한다. 신의 죽음을 받아들이고 영원회귀가 야기하는 허무주의를 극복할 새로운 인간이 태어나야 한다는 것이다.

밀란 쿤데라의 대표작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의 서술형식에도 니체의 이 영원회귀철학이 깊게 관통하고 있다. 니체가 말하는 영원회귀란 똑같은 것의 무한 반복이 아니라, 늘 새로운 것이 반복되는 것, 즉 일회성이 반복되는 것을 의미한다. 고착된 영원한 진리 같은 것이 맨날 되돌아 온다는 것이 아니다. 일회성의 반복, 새로운 것의 반복으로 받아들임은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라는 가능성을 의미한다. 인생은 일회적이다.”(einmal ist keinmal, 독일 격언) 라는 이 명제에 대하는 태도에 따라 삶이 바뀔 수 있음을 밀란 쿤데라는 이 소설에서 지적한다.

 

 

 

니체는 위버멘쉬를 중심으로 차라투스트라의 가르침을 전개한다. 인간의 세계에 내려온 차라투스트라가 무엇보다도 먼저 전한 것 가운데 하나가 바로 신의 죽음이다. 신의 죽음과 더불어 그간의 이원론적이며 목적론적인 세계관도 무너진다. 니체는 오늘날 인간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유형의 인간이 태어나 이 대지의 주인이 되어 인류의 미래를 떠맡아야 한다고 보았다. 이 거듭난 인간에게 붙인 이름이 바로 위버멘쉬다. 위버멘쉬는 새로운 신이 아니다. 초월적 존재라는 이유에서 종래의 신을 거부한 니체가 인간 위에 또다른 신격을 끌어들인다면 자기 모순적이기 때문이다. “모든 신은 죽었다. 이제 우리는 초인이 등장하기를 바란다. 이것이 언젠가 찾아올 위대한 정오에 우리의 마지막 의지가 되기를!” (p.136) 위버멘쉬는 새로운 신이 아니라 모든 인간이 이 지상에서 구현해야 하는 이상적 인간 유형이다. 어떤 특정 존재나 확정된 지위가 아니라 인간 한 사람 한 사람이 끝없는 자기 극복을 통해 성취해야 할 개인적 이상이다. 니체 자신은 물론 차라투스트라도 위버멘쉬는 아니다. 우주 운행의 이치를 터득하고 생의 의미에 눈을 뜬 니체는 차라투스트라의 입을 빌려 위버멘쉬의 가르침을 전파한 것이다. 차라투스트라는 영원회귀와 위버멘쉬를 가르치는 스승의 몫을 다한 것이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니체는 허무주의, 위버멘쉬, 영원회귀, 힘에의 의지 등 다양한 그의 철학의 핵심 개념들을 전개한다. 시적 표현을 통해서 자신의 긍정적, 창조적 철학을 강조한다. 일상적 삶은 끊임없이 되돌아오므로 이러한 운명을 긍정하고 사랑해야 한다. 그럴 때 우리는 삶의 내면의 원리인 디오니소스적 원동력을 알게 된다는 것이다. 타락한 종교인 기독교, 형식주의적인 철학, 낭만적인 요소와 영합하는 예술 등의 문명을 해체하고 왜소한 인간을 극복하는 길은 힘에의 의지를 자각한 초인에 있음을 니체는 역설한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는 많은 상징과 비유가 내포되어 있어 쉽게 이해하기란 어렵다. 하지만 천천히 읽어본다면 차라투스트라의 거침 없는 언행 뒤에 숨어 있는 니체의 인간적인 면모와 그의 사상을 접하는 기회를 맞이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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