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弱肉强食 風塵時代”(약육강식 풍진시대)
대구 김종협
2년 전에 김훈의 단편소설 『화장』을 읽고 매우 감동적인 경험을 한 적이 있다. 작가 특유의 사물과 사람에 대한 묘사가 섬세하고 구체적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누구도 쉽게 말을 꺼낼 수 없는 일들에 대해서 가차없이 매우 차분하고 자세히 설명해 주어서 좋았다. 김훈의 장편소설 『하얼빈』 ( 문학동네, 2022 )이 신작으로 나와 기쁜 마음으로 집어 들었다. 안중근이 이토 히로부미를 죽이기까지 일주일 그리고 검찰 조사와 법정 신문을 거쳐 형장의 이슬이 되기까지의 여정을 그린 작품이다.
김훈은 1948년 서울에서 태어나 오랫동안 신문기자 생활을 했다. 장편소설 『칼의 노래』로 2001년 동인문학상을 수상했으며, 단편소설 『화장』으로 2004년 이상문학상을 수상했다. 저서로는 『빗살무늬 토기의 추억』, 『현의 노래』, 『개』, 『남한산성』, 『공무도하』, 산문집 『풍경과 상처』, 『자전거 여행』, 『내가 읽은 책과 세상』 등이 있다.
『하얼빈』은 ‘안중근 의사의 이토 히로부미 저격 사건’이라는 역사적 사건을 묘사하고자 하는데 중점이 있는 것은 아니다. 『칼의 노래』가 명장으로서 이룩한 업적에 가려졌던 이순신의 요동하는 내면을 묘사했던 것처럼, 『하얼빈』은 안중근에게 드리워져 있던 영웅의 그늘을 걷어내고 그의 가장 뜨겁고 혼란스러웠던 시대에 직면했던 안중근의 내면에 초점을 두고 있다. 안중근의 생애 중에서 극히 일부만을 다루고 있지만, 거사를 하고 사형을 당하기까지 5개월 정도의 시간 배경을 소설에 담은 것이다.
소설의 제목이기도 한 ‘하얼빈’이라는 장소는 어떤 곳인가? 이곳은 동서양 제국주의 세력이 교차되는 주요 거점으로 숙명적으로 만날 수밖에 없었던 장소이다. 하얼빈은 철도의 교차점인데 대련에서 하얼빈으로 오는 남만주 철도(일본 세력),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만주를 가로질러 하얼빈으로 오는 러시아철도가 만나는 장소이다. 세계 거대 세력이 만나는 아주 상징적인 의미를 지닌 하얼빈인 것이다. “하얼빈은 만주의 중심이다. 이토는 대련에서 북상해서 오고 우리는 우라지에서 서행해서 하얼빈으로 간다. 러시아 재무장관 코콥초프는 모스크바에서 하얼빈으로 온다.” (p.114) 그런 의미로 하얼빈이 상징성을 지닌 단어로 제목에 딱 들어맞는 느낌이다.
저자 김훈은 언론 인터뷰에서 “두 젊은이의 시대에 대한 고뇌는 무거운 것이지만, 그들의 처신은 바람처럼 가벼웠고, 젊은이다운 에너지가 폭발하는 것으로 가장 놀랍고 기가 막히게 아름다운 대목”이라고 강조한다. 즉 작가는 나라를 집어삼킨 열강의 제국주의에 홀로 맞선 안중근의 추동력을 청춘의 아름다움에서 찾는다. 이토를 죽이기 위해 하얼빈에 동행했던 우덕순과 안중근의 대화는 그야말로 경이롭다. 두 젊은이는 블라디보스토크의 술집에서 이토 살해를 모의한다. 대의명분이나 추후 대책, 거사 자금 같은 것에 대해선 한마디도 없이, 그저 이토를 죽여야 한다는 뜻이 통해 곧바로 하얼빈으로 향한다.
-이토가 온다는 얘기냐?
-그렇다. 하얼빈으로 온다
-온다고? (p.104) 더 이상 무슨 말이 필요한가...
저자는 약육강식(弱肉强食)의 문제점을 지적한다. 안중근의 ‘동양평화론’은 동아시아 각국이 독립하고 자주적인 체계를 만들어야 이뤄질 수 있다는 개념이다. 하지만 동아시아가 일본 패권 안에 들어와야 평화를 이룰 수 있다는 이토의 문명개화라는 야만성과는 완전히 상반된다. 안중근의 희망은 동양평화에 있었던 것이고, 그래서 감옥안에서 <동양평화론>을 쓰기도 한다. 안중근은 결국 문명개화로 위장된 약육강식에 저항한 것이다. 그리고 안중근의 희망은 총살에 있었다기보다는 말(법정 진술)에 있었던 것이다. 총을 쏘고 나서 법정에서 동양평화를 얘기하고 자기가 이걸 할 수밖에 없었던 당위성을 설명한다. “이토의 작동을 멈추게 하려는 까닭을 말하려는 것에 있다. 살하지 않고 말을 한다면 세상은 말에 귀 기울이지 않을 것이고, 세상에 들리게 말을 하려면 살하고 나서 말 하는 수밖에 없을 터이다. 말은 혼자서 주절거리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에 대고 알아들으라고 하는 것이다.” (p.89)
“왕권이 이미 무너지고 사대부들이 국권을 넘겼는데도, 조선의 면면촌촌에서 백성들이 일어서고 또 일어섰다.”(P.18) 그리고 “ 황태자 이은은 깊이 상심했다. 스승 이토가 왜 조선인의 손에 죽어야 하는지.” (p.169) 살길은 슬픔에 있다고 판단하는 조선 황실과 이은의 모습은 권력자와 기득권자들의 실상을 단적으로 보여줘 서글프다. 나라가 나라 구실을 못하고, 황제가 있어도 백성의 삶을 살피지 못한다면 진정한 황제인가?
책을 다 읽고 덮고 나서 한동안 앉아 있었다.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먼 데서 시끄러운 도시의 소음들이 들린다. 시간이 좀 지났지만 답답한 기분은 쉽게 가시지가 않는다. “弱肉强食 風塵時代(약육강식 풍진시대)” (p.26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