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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레어 키건의 <맡겨진 소녀>

글 쓰기 2024. 3. 1. 12: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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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혜로운 삶

대구 김종협

 

여기 우리를 완전히 매료시키는 소설이 있다. 때 묻지 않고 순수함이 묻어나는 이야기이다. 흥미진진한 서사적인 내용이라든지 어려운 말과 미사여구로 쓰여지지 않은 그냥 따스하게 느껴지는 소설이다. 클레어 키건의 맡겨진 소녀(허진 옮김,다산책방,2024)가 그것이다. 클레어 키건의 글쓰기가 다른 작가와는 달리, 읽는 독자를 빠져들게 하는 묘한 매력을 지니고 있다. 읽다보면 우리네 삶 속에서 느껴지는 아련한 온기를 발견하게 된다.

 

 

클레어 키건(Claire Keegan)1968년 아일랜드 위클로에서 태어났다. 17세에 미국으로 건너가 로욜라대학교에서 영문하과 정치학을 공부한다. 이후 웨일스대학교에서 문예창작 석사 학위를 취득한다. 1999년 첫 단편집인 남극으로 루니 아일랜드 문학상과 윌리엄 트레버상을 수상한다. 다른 작품으로는 이처럼 사소한 것들이 있다.

 

 

아일랜드 시골에 사는 어린 소녀가 먼 친척 킨셀라 부부의 집에서 보내는 순수한 이야기다. 아이가 많은 가난한 집에서 충분한 애정을 받지 못했던 주인공은 엄마가 동생을 출산하기 전까지 친척 부부에게 맡겨진다. 소녀를 본인 아이처럼 살뜰히 돌보는 아주머니와, 한 번도 손을 잡아주지 않았던 아빠와 달리 소녀의 손을 잡고 바닷가를 걷으며 많은 이야기와 경험을 안겨주는 존 킨셀라아저씨가 있다.

 

먼저 주인공(이름이 나오지 않음)이 익숙한 집에서 낯선 친척 집으로 처음 접하는 생활로 본의 아닌 경험을 한다는 점이다. 이는 사람은 익숙한 곳보다는 새로운 곳에서 더 성장하는 계기가 된다는 것을 보여준다. 사람의 마음은 조건과 환경에 따라 끊없이 변하기 때문이다. “나는 집에서의 삶과 여기에서의 내 삶의 차이를 가만히 내버려 둔다.” (p.70) 주인공은 킨셀라 부부의 친절한 보살핌 속에서 제대로 대답하는 법을 배우고 책 읽는 법도 배우며 크게 성장해 간다. 그곳에서 사람 사이의 거리를 배우고 행복의 무게를 깨달으며, 주인공은 아이로서의 인생을 마주하며 조금씩 배워 나간다.

 

 

비밀스러운 아픔을 갖고 있는 킨셀라 부부의 주인공에 대하는 태도가 극성스럽거나 유별하지 않다는 것이다. 이는 클레어 키건의 글쓰기와 같이 화려하거나 군더더기가 없이 매끄럽게 흘러간다. 에드나 아주머니는 주인공이 첫 날 밤 침대에 오줌을 싸도 모르는 척 습한 방에 재운 자기 탓이라고 말한다. 개가 다가와서 매트리스 냄새를 맡고 뒷다리를 들려고 하는데, 아주머니는 아이에게 당황함과 걱정을 주지 않기 위해 재치있게 말한다. “매트리스가 낡아서 말이야. 이렇게 습기가 차지 뭐니. 널 여기다가 재우다니, 도대체 내가 무슨 생각이었을까?” (p.36) 주인공에게 매일 우편함까지 달리기를 시키며 시간을 재주는 존 아저씨의 태도도 다정스럽고 부드럽다. 아이가 기록이 어제만큼 좋지 않다는 걸 이미 알고 있지만 킨셀라 아저씨는 말한다. “첫날보다 19초 빨라졌네. 그리고 땅이 축축한데도 어제보다 2초 줄었어. 꼭 바람 같구나, 너는.” (p.78)

이처럼 아이에게 건네는 칭찬의 말은 자라는 아이에게 자존감과 긍정적인 에너지를 주기에 충분하다 할 것이다.

 

여름 몇 달 동안 친척 집에 맡겨진 주인공은 킨셀라 아저씨를 통해 아무 때나 말을 하지 않는 것의 중요성을 배우며 성장한다. “넌 아무 말도 할 필요 없다. 입 다물기 딱 좋은 기회를 놓쳐서 많은 것을 잃는 사람이 너무 많아.” (p.73)

집에 도착해 엄마가 무슨 일이 있었던 거냐고 묻지만, 주인공은 아무 일도 없었다고만 할 뿐 입을 다물고 말이 없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절대 말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알 만큼 충분히 배웠고, 충분히 자랐음을 보여준다. 소설의 마지막 부분에서도 아주머니에게 절대로 말하지 않겠다고 전하고 싶어 하는 주인공의 마음이 나타나기도 한다.

 

 

아빠,” 내가 그에게 경고한다. 그를 부른다. “아빠” (p.98) 킨셀라 아저씨에게 힘껏 안긴 채 자신에게 데리러 오는 아빠를 보며 외치는 말이 상징성과 함께 중의적이다. 낳아준 자기 아빠를 의미하는지, 사랑으로 돌봐준 킨셀라 아저씨를 두고 하는 말인지 정확히 구별하기란 어렵다. 저자의 함축적이고 여백의 미를 느끼게 해주는 부분이다. 짧은 소설이지만 교훈적이고 울림을 주는 책이다. 이런 말이 떠오른다. “지혜로운 어른은 자신의 삶이 아이의 본보기가 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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