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디스 워튼의 <이선 프롬>을 읽고
슬픈 자화상
“지나, 나는 당신을 탓하지도, 나 자신을 탓하지도 않아. 어쩌면 서로 헤어지는 게 우리 둘 모두에게 더 좋겠지. 나는 서부로 가서 새로운 운명을 개척해 보려고 해.” (p.121) 이선은 헛되게 보낸 삶에 대항하여 자신을 방어하려는 모든 건전한 본능을 편지에 담는다. 하지만 결과는 어떻게 될까? 이디스 워튼의 『이선 프롬』 (김욱동 옮김, 민음사, 2022)은 도덕과 인습이라는 집단적 억압에 맞선 개인의 내면 세계를 섬세하게 그려낸다. 주인공 이선은 사회적 의무를 대변하는 지나와 개인의 자유를 상징하는 매티 사이에서 그동안 자신이 헛된 삶을 살아왔음을 깨닫고 절망한다. 1911년에 출간된 113년이 지난 작품이지만 현재의 우리에게 생각할 무엇가를 던지는 소설이다.
이디스 워튼(Edith Wharton)은 미국 뉴욕의 명망가인 존스 가문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스페인, 이탈리아, 프랑스, 독일 등 유럽 각지를 돌아다니며 생활했다. 학교에 다니는 대신 가정교사로부터 교육을 받으며 아버지의 서재에서 문학, 철학, 종교 서적을 탐독했고, 1878년 처음으로 시집을 출간한다. 1차 세계 대전 때에는 프랑스에서 전쟁 구호 활동을 적극적으로 펼쳤으며 이 공로로 프랑스 정부로부터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받았다. 전쟁이 끝난 뒤 발표한 『순수의 시대』로 1921년 여성 최초로 퓰리처상을 수상한다. 저서로는 『여름』, 『환락의 집』, 『암초』 등이 있다.
주인공 이선은 뉴잉글랜드의 시골 마을에 사는 농부로 과거에 일 년 남짓 대학교에서 공부한 적이 있다. 그러던 중 부모님의 병이 깊어지자 꿈을 접고 시골로 내려온다. 친척 누이 지나와 애정 없이 결혼한 뒤 그녀마저 알 수 없는 질병에 시달리면서 이선은 완전히 시골 마을에 발이 묶인다. 이선의 짧은 공부는 미련처럼 남아 그의 감수성에 영향을 부여하고 일상 너머의 삶을 상상하게 만든다. 그러던 어느 날, 지나의 친척 매티가 집안일을 돕기 위해 부부의 집으로 들어온다.
『이선 프롬』에서는 이디스 워튼 작가의 내적 삶이 그대로 드러난다. 이디스 워튼과 에드워드가 거의 평생에 걸쳐 신경 쇠약증을 비롯한 질병에 시달린 것처럼 작중 인물들도 온갖 질병에 시달린다. 주인공 이선 프롬은 작가 자신이고, 아내 지나 프롬은 작가의 남편 에드워드이며, 매티 실버는 모턴 풀러턴인 셈이다. 이디스 워튼은 남녀의 역할만 살짝 바꿔 놓았을 뿐, 불행한 결혼 생활을 둘러싼 경험을 이 작품에 그대로 옮겨 놓았다. 유서 깊은 뉴욕의 상류층 가문 출신이었던 이디스 워튼은 일찍 사교계에 데뷔해 결혼한 뒤 애정 없는 결혼 생활과 작가적 야심 사이에서 갈등하는 삶을 살았다.
소설은 20세기 초 미국의 사회 통념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한다. 지나 프롬이 사회적 인습과 제도를 대변하는 인물이라면 매티 실버는 개인의 자유를 대변하는 인물이다. 주인공 이선이 매티가 상징하는 편안함과 자유스러움을 구하려고 하지만 사회는 그에게 지나가 상징하는 의무와 전통을 강요한다. 이처럼 어떤 의미에서 개인과 사회의 갈등은 영원히 해결할 수 없는 것인지도 모른다. 사회의 제도와 인습에 무게를 두다 보면 개인은 어쩔 수 없이 자유를 구속받게 된다. 주인공 이선이 결국 매티와 함께 자살이라는 나약한 방법을 선택한 것은 개인의 자유와 사회의 인습을 절충하기가 그만큼 힘들다는 방증이어서 안타깝게 다가온다. “저 나무가 우릴 기다리고 있어. 저 나무도 아는 것 같군. 마지막 순간 대기가 수백만 겹의 불타는 전선처럼 그를 스치고 지나갔다. 그러고 나서 느릅나무…….” (p. 154)
주인공 이선 프롬과 등장인물들은 하나같이 인습이나 전통이라는 집단적 압력에 맞서다가 희생된 사람들로 그려진다. 주인공은 폐쇄적인 제도에 갇힌 채 사회라는 감옥에 머리를 부딪쳐 자신을 파멸시키거나 스스로 감옥에 자신을 맡겨 버림으로써 이른바 삶속에서 죽음을 경험하게 된다. 저자는 개인의 자유를 억압하는 사회의 인습과 전통을 흔히 감옥이라는 이미지로 묘사한다. “이 엄연한 현실이 마치 교도관이 죄수에게 수갑을 채우듯 그를 압박했다. 뻐져나갈 길이라고는 정말 하나도 없었다. 평생 죄수와 다름없었다.” (p. 123), “맷, 난 손발이 모두 꽁꽁 묶였어. 내가 해 줄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어.” (p. 143) 손발이 묶인 족쇄의 이미지는 주인공이 놓인 비극적 상황을 감옥으로 상징적으로 보여 준다.
또한 저자는 20세기 초 미국이 맞부딪치고 있는 농촌 현실을 문제를 드러낸다. 남북 전쟁이 끝나고 나서 뉴잉글랜드 지방의 경제 현실이 얼마나 가혹했는지를 작품 속에서 밝힌다. 중서부나 남부 지방과 달리 뉴잉글랜드에서는 오히려 인구가 줄어들었다는 사실은 이 점을 뒷받침한다. 농촌 인구가 눈에 띄게 급격히 줄어들었다는 것은 그만큼 농촌에 살기가 어려웠다는 뜻이다. 전쟁 뒤에 산업화와 공업화가 본격적으로 진행되면서 도시가 비대해질 대로 배대해진 반면 농촌은 더욱더 피폐해졌다는 것이다. 이 마을에 사는 다른 젊은이들은 벌써 도시로 빠져나가고 남아 있는 사람이 별로 없는 점을 하먼은 이선 프롬을 두고 빗대어 말한다. “저이는 스탁필드에서 너무 많은 겨울을 난 것 같아.” (p. 11)
이디스 워튼의 작품 중에 대표작인 『이선 프롬』은 미국 중고등학교 독서 목록에 들고, 대학에서 문학을 전공하는 학생들에게 인문학과 일반 교양 분야에 꼭 들어가는 목록으로 존재 한다. 도덕과 윤리라는 이름으로 억압해 버리는 사회상 속에서 우리 내면의 존재를 찾아보는 귀중한 책으로 다가와 꼭 추천하고 싶은 소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