윌리엄 골딩의 <파리대왕>
인간 내면의 악마적 본성
외딴섬에 고립된 소년들이 원시적인 야만 상태로 퇴행해 가는 과정을 그린 작품이 있다. 윌리엄 골딩의 『파리대왕』 (유종호 옮김, 민음사, 1999)이다. 인간 사회를 우화적으로 묘사한 작품으로 1983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다. 이 소설은 무인도로 떨어진 소년들의 단순한 모험담이 아니다. 인간 본성의 탐구 문제를 관심 있게 다루고 있다. 인간이 악을 행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니고 있으며 인간의 도덕 체계가 근본적으로 천박하다는 새로운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윌리엄 골딩은 1911년 영국 콘월 주에서 태어났다. 1930년 옥스퍼드 대학의 브레이스노스 칼리지에 입학해 자연 과학과 영문학을 전공한다. 대학 재학 중 서정시 29편을 묶은 첫 책 『시집』을 출간한다. 이후 해군으로 2차 세계대전에 참전해 독일 전함 비스마르크호 격침 및 노르망디 상륙 작전에 기여한다. 저서로는 『상속자들』, 『핀처 마틴』, 『자유 낙하』, 『첨탑』, 『피라미드』 등이 있다. 희곡 『놋쇠 나비』와 에세이집 『핫 게이츠』를 발표했으며 1980년 출간된 『통과 제의』로 부커상을 받았다.
위기적 상황속에서 한 무리의 영국 소년들을 비행기로 안전 장소로 후송하는 공수 작전이 전개된다. 이 비행기는 명시되지 않은 적군의 요격을 받아 격추되고 소년들은 비상 탈출하여 태평양상의 무인도에 불시착한다. 소년들은 만 다섯 살에서 열두 살에 이르는 어린 아이들이다. 처음에는 열두 살의 랠프를 지도자로 선거해서 제법 생명유지를 위한 조처를 요령있게 진행한다. 산정에 봉화를 올려 구조 신호로 삼는 신중함도 발휘한다. 랠프는 바닷가에 오두막을 세우자고 제안한다. 하지만 사냥을 강조하는 잭 메리듀와 대립하게 된다. 잭 메리듀와 그의 사냥패들은 멧돼지를 잡아서 크게 위세를 떨친다. 이후 랠프의 지도력은 약화된다. 랠프를 옹호하던 돼지라는 별명의 근시 소년은 잭 메리듀 일당에게 안경까지 빼앗기고 만다.
저자는 이 소설에서 인간 내면에 자리하고 있는 악, 권력욕의 일면을 보여주고자 한다. 실제로 윌리엄 골딩은 제2차 세계 대전에 참전하면서 수많은 죽음 앞에서 인간성의 상실 같은 쓰라린 아픔을 경험했다. 소설은 전쟁터에서 광기어린 살육을 범하는 군인들의 단면을 무인도의 아이들에 의해 묘사하고 있다. 저자는 ‘악’은 환경에서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인간 본성에 기인한다고 보고 있다. 인간 본성은 어둠으로 파악된다. 소설 속 잭 메리듀는 야만으로의 복귀를 대표하는 어둠의 인물이다. 잭 메리듀와 그의 추종자들은 사냥에 매료되고 스스로 야만인으로 타락해 간다. 외부로서의 압력에 의해서가 아니라 스스로 규칙과 같은 업무를 모두 던져버린다. 파괴적인 성향과 잔학에의 충동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이 소설의 ‘파리대왕’은 헤브루어의 베엘제버브를 번역한 것이다. 곤충의 왕이란 뜻을 내포하지만, 이 소설에선 공포를 불러일으키는 악마를 가리키고 있다. “넌 그것을 알고 있었지? 내가 너희들의 일부분이란 것을. 아주 가깝고 가까운 일부분이란 말이야. 왜 모든 것이 틀려먹었는가, 왜 모든 것이 지금처럼 돼버렸는가 하면 모두 내 탓인 거야” (p.214) 사이먼은 진정으로 두려운 것은 피에 열광하는 우리 내면의 악임을 깨닫는다. 즉 사이먼이 안간힘을 쓰며, 파리대왕과의 대화를 통해 인식하는 것은 인간이 악을 행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니고 있음을 알게된다. 인간의 본성이 악하다니! 조금 섬뜩하게 느껴진다.
이 책에서 저자는 상징을 능란하게 사용하고 있다. 소라는 회의 진행에 있어 중요한 의미를 띠면서, 어떤 권위를 부여받고 있다. 이 소라의 무시와 파괴는 규칙과 합법성의 파기를 상징한다. 돼지라는 별명의 소년이 쓰고 있는 안경은 지식과 문명을 상징한다. 즉 그의 안경은 불의 근원이 된다는 점에서 문명의 상징이다. 이 또한 망가지고 깨어지는 과정은 문명의 점진적인 쇠퇴를 의미한다. 두려워하는 짐승이 사실은 시체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려주려 내려왔다가 죽음을 당하는 사이먼은 성자이며 예언자의 상징이다. 사이먼은 무인도에서의 공포가 사실은 소년들의 내부에 있다는 것을 아는 깨어있는 상징의 인물인 것이다.
스웨덴 한림원에서 노벨상 수상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 바 있다. “윌리엄 골딩의 소설은 사실주의 서술 기법의 명쾌함과 신화적인 보편성과 다양성을 이용해 현대의 인간 조건을 명확하게 드러낸다.” 이 책 군데군데에서도 그 표현들을 접할 수 있다. “야트막한 물가를 따라서 밀려오는 맑은 바닷물 속에는 달빛 같은 빛을 내고 불처럼 이글이글한 눈을 한 이상야릇한 생물이 가득하였다.” (p.229) 해안선을 따라서 반짝이는 모래알이나 조약돌, 밀물의 물결들에 대한 시선은 가히 시인다운 섬세함을 느끼게 해준다.
『파리대왕』은 우리가 살아가는 정상적인 사회와 사회를 유지하는 규칙이 얼마나 쉽게 무너질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인간 내면에 깔린 악을 통제하지 못한다면 전쟁이나 독재 같은 비극적인 참상이 언제든지 일어날 수 있음을 암시한다. 갈등이 결국에는 광기로 흘러가는 극단적인 현상을 경계하고, 협력의 길을 모색해야 할 것이다.
인간은 내면의 악마적 본성을 극복할 수 있는지? 우리 자신이 어떤 방향으로 나아갈 지를 고민케 하는 자성의 시간을 갖게하는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