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나 번스의 <밀크맨>
존엄한 개인
벨파스트(북아일랜드 수도)를 배경으로 한 소녀의 일상을 통해 북아일랜드 무장독립투쟁 시기를 그린 첫번째 장편 『노 본스』로 2001년 영국왕립문학회에서 수여하는 위니프리드홀트비 기념상을 받았던 ‘애나 번스’ 작가가 있다. 그는 2018년 세 번째 장편 소설 『밀크맨』(창비, 2019)으로 북아일랜드 출신으로는 처음 맨부커상을 수상하며 일약 세계적 작가 반열에 오른다. 2019년에는 전미도서비평가협회상과 뛰어난 정치소설에 주어지는 오웰상을 수상하기도 한다. 소설은 1970년대 북아일랜드에서 길 하나를 사이에 두고 적과 극단적으로 대치하고 있는 폐쇄적인 마을 공동체 내에서 유 · 무형의 폭력에 노출된 열여덟살 주인공 여성의 일상과 내면을 일인칭 시점으로 그려낸다.
일인칭 화자인 주인공인 나는 십남매 중 가운데 아이로 걸어가며 책 읽기를 좋아하는 열여덟살 여자다. 여느 날처럼 책을 읽으며 길을 가는데 한 남자가 흰 승합차를 세우고 나의 가족을 아는 척하며 말을 건넨다. 사람들이 ‘밀크맨’(우유배달부)이라 부르지만 우유를 배달하지는 않는 그 남자는 마흔한살 유부남이자 무장독립투쟁 조직의 주요 인사로서 지역사회에서 명망이 두터운 인물로 알려져 있는 인물이다.
저자는 북아일랜드 독립투쟁에 관한 사회적 상황을 예리하고 절묘하게 표현하고 있다. 주인공이나 등장 인물들을 통해 그려지는 사회의 모습은 초현실적으로 느껴질 만큼 묘사한다. 직접적으로 묘사하지는 않는다. 즉 억압과 폭력의 그림자 속에서 살아가는 모든 사람의 상황을 이해하기 위해선 북아일랜드의 역사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 즉 1960년대 말부터 90년대 말까지 북아일랜드 독립을 요구해온 소수파 가톨릭 북아일랜드 공화국군(IRA)과 이를 저지하려는 영국의 세력(UDA)간의 테러와 보복, 납치와 살인이 30년에 걸쳐서 이어졌다. 이 기간 동안 북아일랜드와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지방에서는 한 해 평균 100여명, 총 3,500여명이 숨지고 4만7,500명 이상이 부상 당했다.
이 소설의 모든 인물과 장소가 고유명사로 불리지 않는다. 영국은 ‘물 건너’로, 아일랜드는 ‘국경 건너’로, 같은 도시 내 친영국 지역은 ‘길 건너’ ‘길 저쪽’으로, 주인공이 사는 친아일랜드 지역은 ‘길 이쪽’으로 불리는 ‘국가 반대자’ 조직이다. “또 정치적 문제도 있는데 반대자가 존재하는 이유가 없다면 반대자를 생각할 이유도 없으니까.” (p.167) 실제 역사와 깊은 관련이 있으면서도 공식 기록의 이름, 장소에 구애받지 않고 표현한다.
또한 소설은 존엄하고자 하는 한 개인의 의지가 유, 무형의 폭력이 난무하는 상황에서 어떻게 무력화되는지를 생생하게 보여준다. 몸에 손 하나 대지 않고도 충분하게 성적인 위협을 가할 수 있으며, 이로 인해 일상이 천천히 무너질 수 있다. 하지만 실제로 물리적, 육체적 폭력이 난무하는 당시의 시대 상황에서 전혀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정치적 문제가 팽배한 상황에서 그런 일 따위는 중요하게 취급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주인공의 지속적인 호소를 무시할 뿐만 아니라 심지어 오래된 친구는 말한다. “네가 자초한 거야. 가장 오래된 친구야. 너한테 그 습관 고치라고 말했는데. 이제 거기 중독된 것 같더라 - 길에서 걸으면서 책 읽는 거 말야.”(p.283) 여자에게 가해져온 소리 없는 폭력, 여성이 어떤 취급을 받는지를 결정적으로 보여준다. 지금도 이런 불공정한 토대 위에서 피해자의 목소리는 묵살하고 가해자의 목소리만 듣는 현실을 생각하면 착찹한 마음이 든다.
애나 번스는 한 인터뷰에서, 이 작품을 벨파스트에서 보낸 유년 시절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썼다고 밝히며 “나는 폭력과 불신, 피해망상이 만연하고 사람들은 가능한 최대로 스스로 알아서 생존해야 하는 곳에서 성장했다”고 말했다. 이 소설은 밀접한 관계로 묶여 있는 공동체에서 가십과 사회적 압력이 미치는 악 영향들을 훌륭하게 그려낸다. 40년 전 북아일랜드 한 시대의 이야기가 아닌, 지금도 일어나는 위기 사회에서 한번쯤 성찰하게 하는 의미 있는 책이라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