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도르 마라이의 <열정>
인간의 운명
산도르 마라이가 1939년에 발표한 『유언』에 이어 1942년 『열정』 (2001,솔)이 발표되자 이탈리아, 독일에서 베스트셀러 자리를 차지한다. 오랜 망명 생활로 조국 헝가리에서 출판 금지되었으나, 이 소설로 잊혀진 작가에게 세계적인 문호로서의 자리를 찾게 해준다. 작품은 사랑과 증오, 신뢰와 배반, 환상과 기만, 애틋한 그리움과 덧없는 감정을 중심으로 인간의 삶과 운명에 대한 문제를 깊이 파고든다.
어린 시절부터 24년 동안 거의 언제나 형제처럼 붙어 지냈던 두 친구가 헤어진 지 41년 만에 만나 하룻밤 동안이 나누는 대화가 이 소설의 내용이다. 쌍둥이 형제와 같은 두 친구, 헨릭과 콘라드이다. 콘라드는 주인공의 아름다운 아내 크리스티나와 사랑에 빠지지만 결국 비겁하게 도주해버린다. 말 한 마디 없이 사라진 연인과 8년간 가혹한 침묵을 지키는 남편 사이에서 크리스티나는 죽음을 택한다.
친구는 사라지고, 아내는 죽었지만 헨릭은 분노와 절망 그리고 고독 속에서 41년을 친구를 기다린다. 인생의 황혼을 맞은 칠순의 노인이 지난 세월을 회고하면서 인생과 사랑에 대해 깊이 성찰한다.
이 작품 <열정>은 묘한 느낌을 주는 소설이다. 자신의 분신처럼 생각하는 친구가 자신의 아내와 사랑을 하고, 급기야 사냥터에서 자신을 죽이려까지 한다. 그러나 주인공 헨릭은 오로지 기다림 때문에 그는 분노와 절망,고독 속에서도 오랜 세월 친구를 기다리며 목숨을 부지한다.
보통의 사람이라면 41년 동안의 긴 시간을 참고 견딜 수 있을까? 배신감과 절망에 휩쓸려 고독으로 41년의 시간을 기다린다! 쉬운 일은 아니다.
사람은 늙어가면서 알게 되는 것일까. ‘세상을 떠나는 사람은 최후의 올바른 대답을 하지“라 는 주인공 말이 찡하게 다가온다. 주인공 헨릭의 다음 말에서, 시간의 속죄 과정이 분노의 기억을 정화시키는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기다림이 지나가고 복수의 순간이 온 지금, 놀랍게도 나는 우리가 서로에게서 알아내고 고백하거나 부인할 수 있는 모든 것이 얼마나 절망적이고 무가치한가를 느끼네.” (p.250)
전반부에서는 친구에 대한 배신감, 분노로 41년을 기다린 감정을 표현한다. 후반부로 가면서 본인의 고백적인 대화를 통해 차츰 감정이 순화되면서 태도가 친구에 대한 분노에서 인간에 대한 성찰로 승화된다. 친구의 응징, 복수 보다는 인간 내면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그래서 잊혔던 아내에 대한 그리움이 재발견되고 죽은 아내를 그리워하며 마지막 남은 생을 사는게 자신의 운명이라고 받아 들인다. 말이나 글이 아닌 해답은 삶을 살면서 알아 가는 것이구나! 생각하게 만든다.
작가는 사랑과 우정의 소설이 아닌 사랑과 우정이 빚어낸 비극의 원인과 비극 앞에 선 인간의 혼란과 갈등을 파헤치기 위해서 인간의 내면에 존재하는 문제에 집중한다.
얼마 전 같은 모임을 하는 친한 친구와 이해하기 어려운 사연으로 연락을 끊고 멀리하게 되었다. 원인을 따지지 않고 그냥 친구가 그리 하도록 지내고 있었는데, 마음은 심히 편치 않았다. 이 시기에, 이 소설을 읽으면서 무척 마음의 위안을 받은 작품이다. 감정 이입해서 마음을 순화하고 스트레스를 푸는데, 도움이 되는 글귀가 많아서 좋았다. 산도르 마라이의 짧고 응축된 언어들이 필자를 사로잡는 솜씨에 놀랐다.
이 소설은 결말 부분의 주인공의 독백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작가의 언어가 사소한 일들에 들떴던 일상속의 우리들을 성찰의 시간으로 돌려 놓는다. 주인공의 말을 통해 우리는 우리 자신을 돌아보게 되고, 타인을 보게 되고, 타인을 재단하려 했던 우리를 다시 돌아보게 만든다.
“어느 날 우리의 심장, 영혼, 육신으로 뚫고 들어와서 꺼질 줄 모르고 영원히 불타오르는 정열에 우리 삶의 의미가 있다고 자네도 생각하나? 무슨 일이 일어날지라도? 그것을 체험 했다면, 우리는 헛산 것이 아니겠지? 그것은 사람이 아닌 그리움을 행해서만도 불타오를 수 있을까?”(p.27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