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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심 고리키의 <은둔자>

글 쓰기 2024. 5. 29. 06: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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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에 대한 믿음

 

막심 고리키의 은둔자(이강은 옮김, 문학동네, 2019)1924년 단편으로 펴낸 러시아 혁명 이후의 작품이다. 고리키의 혁명 이후의 작품은 더 이상 이념과 사회적 목적에 부합하는 혁명적 주인공을 내세우지 않는다. 은둔자에는 사랑과 위로가 넘치는 주인공이 등장한다. 주인공의 모습에는 사랑과 위로를 베푸는 성자와도 같은 현재의 삶과 추하고 일그러진 외모, 그리고 어두운 과거가 복잡하게 뒤엉켜 있다. 저자의 비판적이고 이념적 시점을 벗어난 독립적인 인물들의 생애와 내면을 그리는 데 집중한다. 어쩌면 주인공의 형상은 혁명 과정을 거쳐 망명길에 오른 막심 고리키의 정신세계를 담고 있는지도 모른다.

 

 

막심 고리키는 1868년 러시아 중부 지역 니즈니노브고로드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알렉세이 막시모비치 페시코프이고, 일찍 부모를 여의고 외할아버지 밑에서 자랐다. 어린 시절부터 하층 직업을 전전하며 생계를 꾸려갔으며 그 와중에 독학으로 글을 쓰고 수많은 책을 읽었다. 1892년 막심 고리키라는 필명으로 마카르 추드라를 발표한다. 체호프, 톨스토이와 교류를 나누었고, 특히 레닌과 평생 우정을 나누게 된다. 저서로 첼카시, 스물여섯 명의 사내와 한 처녀, 바다제비의 노래, 어머니등이 있다.

 

 

주인공 사벨리는 산속 동굴에 은거하며 살아가는 인물이다. 그는 온갖 세상 풍파를 겪은 사람으로 불그죽죽한 얼굴과 눈꺼풀이 있어야 할 자리에는 붉은 흉터가 자리잡고 있는 흉측한 외모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산 아래 사람들은 그를 존경하며 어렵고 힘든 일이 생기면 그를 찾아와 상담한다. 그는 도덕적 훈계나 논리적 설교가 아니라 진정한 사랑이 담긴 말로 그들의 말을 들어주고 위로한다.

 

 

막심 고리키는 주인공 사벨리를 통해 인간에 대한 믿음을 보여 준다. 은둔자 노인은 인생을 달관하고 세상사를 꿰뚫어보며 사람들을 위로해 주며 소통한다. 그에게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종교적인 계율이나 금욕을 요구하지 않는다. 힘들고 아픈 상처들에 대한 위로의 말을 던지며 그들 자신 속에 들어 있는 아름다움과 믿음의 힘을 일깨워준다. “알지, 너는 지상에 핀 꽃이야. 주님은 널 기쁨으로 키워주셨어. 그래서 넌 커다란 기쁨을 줄 수 있단다. 너의 예쁜 눈과 맑은 눈빛은 모든 영혼의 축제란다. 밀라야!” (p.225) 밀라야(러시아어로 사랑하는의미의 여성형 호칭)라는 단어를 은둔자는 부드럽게 기쁨으로 충만한 소리로 다양하게 발음한다. 이 단어에는 존재의 의미와 삶의 모든 아름다움을 느끼는 사랑으로 세상의 고통을 편안하게 해주는 힘이 담겨 있다. 은둔자 사벨리는 자신의 추함과 어두운 과거에서 경험한 자신 안에 숨어 있는 가장 순수한 불꽃을 피워올리는 존재이다. 그의 말 속에는 무한히 다양한 어조와 살아 숨쉬는 숨결이 담겨 있다. 막심 고리키는 은둔자라는 등장 인물을 통해 새로운 어조와 존재 자체의 생명 현상을 지향코자 한다.

 

 

주인공 은둔자는 살아가는 환경 속에서 자연과 완전히 동화된 모습을 보여준다. 마른풀 냄새가 가득한 동굴, 푸르른 하늘과 계곡 아래 풀숲을 헤치며 흐르는 시냇물 등 그는 이미 자연과 한몸이 되어 있는 존재이다. 그는 저녁 추위에도 모닥불을 굳이 피우지 않으려고 한다. 온갖 살아 있는 작은 것(날벌레)들이 몰려들어 타 죽을까 걱정하는 것이다. “그는 숲속에서 열심히 노래하는 되새에게 말을 걸었다. 마음대로 불러라, 실컷 불러라, 너의 날이 밝았다!” (p.208) 따스한 대기 속에 풀냄새와 바람의 숨결, 흐르는 계곡의 물소리와 함께 온갖 생물들과 대화하는 그의 목소리가 자연스럽고 정겹다.

 

 

막심 고리키는 이 소설을 집필하면서 말했다. “자신의 내면에 무성하게 자란 수염을 깎고 싶으며 새로운 어조와 새로운 형식을 찾고 싶다.” 저자의 의도대로 분명 이 은둔자의 형상에는 막심 고리키의 변화된 내면의 일부가 투영되어 있다. 주인공 은둔자에게는 혁명의 이념 보다는 사랑과 위로의 아름다운 형상이 내재한다. 은둔자는 막심 고리키가 표방해 온 기존의 문학세계와는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막심 고리키의 새로운 어조와 형식을 사벨리라는 새로운 인간형으로 창조해 낸 것이다. 은둔자는 고리키가 작가 생활 내내 인간과 삶의 문제가 간단치 않다는 진실을 상당히 깊이 인식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삶과 현실을 직시하면서 그 속에서 삶과 사람에 대한 깊은 연민을 가진 고리키의 고민을 만나 보면 큰 울림으로 다가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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