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인숙의 <더 게임>
왜곡된 기억
김인숙의 『더 게임』 (문학동네, 2023)은 40년 동안 쉬지 않고 작품 활동을 해온 그녀의 첫 번째 추리소설이다. 사람들은 어떻게 기억을 왜곡하는가? 사실이나 진실이라고 믿는 왜곡된 기억이 얼마나 큰 파급과 파장을 미칠 수 있는가를 보여준다. 저자는 세심한 관찰로 주변에 놓여있는 사건을 유기적으로 연결해 하나의 완성된 사건으로 만들어낸다. 기묘한 칼부림과 죽은 사체 등장의 시작과 끝을 미스터리하게 깊이 있게 그려내고 있다.
김인숙은 1983년 조선일보 신춘문예를 통해 작품활동을 시작한다. 소설집 『칼날과 사랑』, 『브라스밴드를 기다리며』, 『단 하루의 영원한 밤』과 중편소설 『벛꽃과 우주』가 있다. 한국일보문학상, 현대문학상, 이상문학상, 황순원문학상, 오영수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장편소설로는 『꽃의 기억』, 『봉지』, 『미칠 수 있겠니』, 『모든 빛깔들의 밤』 등이 있다.
자수성가한 온라인 게임 회사 대표 황이만은 22년 전에 데이트 도중 이유를 알 수 없는 칼부림을 당한다. 이연희는 사건 직후 연락을 끊고 감쪽같이 사라져버린다. 시간이 흐르며 기억과 감정이 점점 희미해지기는 했으나 그날의 사건은 황이만의 삶에 지속적으로 영향을 끼친다. 그로부터 22년 후, 황이만은 dufma0724라는 낯선 아이디로부터 의문의 메일을 받는다. 그날 황이만은 뉴스에서 칼부림이 발생한 골목에 묻혀 있던 누군가의 백골 사체가 발굴되었다는 소식을 접한다. 황이만은 자신의 사건을 담당했던 퇴직 형사 안찬기에게 진상을 파헤쳐달라고 의뢰한다. 안찬기는 노련한 수사를 통해 관련 인물을 조사하던 중 사건에 연루된 모든 사람들에게 묘한 의구심을 느낀다.
황이만은 처음에는 마치 피해자처럼 보이다가 어느 순간 의심스럽게 가해자의 입장으로 변해간다. 자신을 가해자가 아닌 피해자의 입장에 놓기 위해서 스스로에게 하는 거짓말, 자기 스스로를 속이는 거짓말도 등장한다. 자기를 속이기 위해서 거짓말을 한 게 아니라, 존재하기 위해서 살기 위해서 자기를 속여 나가는 과정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에 안찬기는 처음 황이만을 믿었다가 나중에 믿지 않게 된 다음 모든 걸 밝혀낸다. 즉 황이만의 기억을 벗겨 나간다. 저자는 황이만을 통해 기억이 어떻게 사람을 왜곡시키고, 본인이 살기 위해서 얼마나 그 기억을 스스로 왜곡시키는지를 보여준다. “남자는 끈질기게 다가왔다. 열쇠 줘요. 병원에 데려가야 해요. 아프단 말이에요.” (p.331), “그는 연희의 빰을 후려갈겼다. 연희의 얼굴이 휙 돌아가 벽에 부닥쳤다.” (p.333) 기억도 진짜가 아니다. 기억은 조작되고 다시 만들어 진다.
기억에 대한 연구를 했던 케임브리지대학 심리학자인 프레드릭 바틀릿은 이렇게 말했다. “기억한다는 것에 대해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그대로 저장했다가 고스란히 꺼내는 것이라고 알고 있는 것과는 달리 각자 가진 틀에 맞춰 재구성하는 것이다.” 우리는 과거를 있는 그대로 기억하지 않고 나도 모르는 사이에 현재의 관점에서 재구성한다는 것이다. 기억이라는 것은 나 혼자만의 상황보다는 다른 사람이 얽혀있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황이만처럼 우리도 모르게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기도 한다. 나의 기억 왜곡으로 다른 사람을 상처주는 일은 없어야 하지 않을까?
그날 실종된 남동생을 20여 년간 찾아 헤매며 고통으로 단련된 미스터리한 인물 김주희와 황이만의 예전 애인 이연희, 그리고 민혁의 아내가 주목을 끄는 인물이다. 이연희는 김주희에게 말한다. “미안합니다. 평생 동안 미안했습니다.” (p.368), “그날 황이만의 방에 갔던 것도, 강노을이 나를 구하려고 그런 일을 저지른 것도, 동생분이 그렇게 된 것도, 다 내 잘못이라고 생각했습니다.” (p.370) 김주희는 자신 또한 다쳤으면서 자신의 잘못만 생각하고 산 그 여자의 세월은 얼마나 참혹했을 것인가를 생각한다. 그리고 민혁의 아내도 김주희가 일하는 떡볶이 가게를 찾아와 말한다. “잘못했습니다. 제가 용서를 빕니다.” (p.378) 김주희는 주열이 사라진 뒤에 살아온 세월과 영문도 모른 채 파국 속으로 끌려들어간 민혁의 아내의 세월도 지옥이었겠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잘못했다는 말을 하지 못해 그게 병이 된 거라고 믿는 여자는 충분히 자신의 대가를 치렀다. 하지만 황이만이라는 자는 그렇게 뻔뻔하게 살아갈 수가 있나, 그런 사람을 그렇게 놔두어도 되겠나란 생각에 김주희는 분노가 치민다. “당신도 조용히 대가를 치러요. 당신이 치러야할 대가를 치르라고요. 알겠어요?” (p.242) 인간은 무슨 짓이든 저지를 수 있다는 것과 때때로 인간은 엉뚱할 정도로 선하고 연약한 존재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일부러 의도적인 것일 수 있고, 스스로를 피해자라고 생각하는 가해자들도 현실에선 참 많다. 자기 자신을 스스로 속이는 거짓말도 서슴없이 한다. 『더 게임』은 자기가 사실이나 진실이라고 믿는 왜곡된 기억이 얼마나 큰 파급과 파장을 미칠 수 있는가에 대해 잘 보여준다. 그런 왜곡된 기억이 용서되는 것이 아니라 그냥 묻혀버리는 현실이 안타깝다. 사람이 사람답게 살려면 잊지 말아야 하는 기억들인데 말이다. “그중 누가 칼로 찌른 자이고, 누가 찔린 자인지도 몰랐다. 단 하나 확실한 것은 죽은 자가 있다는 것이고, 그가 김주열이라는 사실뿐이었다.” (p.240) 『더 게임』은 확실한 결말을 매듭지지는 않는다. 저자는 열려 있는 결말을 독자의 몫으로 남겨둔다. 요즘 같은 더운 날씨에 세밀한 묘사가 돋보이는 김인숙의 이 추리소설을 읽는다면 시원한 청량 음료를 마시는 기분을 느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