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승옥의 <무진기행>
무진의 안개
1962년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단편 『생명연습』이 당선되어 작품활동을 시작한 작가의 1964년 단편 『무진기행』이다. 《김승옥 소설전집 1》(문학동네, 1995) 중 단편 소설 『무진기행』은 감각적인 문체, 배경과 인물의 배치, 언어의 정확한 사용으로 우리 현대소설의 한 모범을 보여주는 김승옥의 대표적 작품이라 하겠다.
주인공은 동거하던 여자가 떠나버리자 남편을 잃고 혼자 남은 지금의 아내와 결혼한다. 결혼한 뒤 그는 곧 제약 회사의 전무 자리를 약속받는다. 즉 “당신 안색이 안좋아요. 어머님 산소에 다녀 온다는 핑계를 대고 무진에 며칠 동안 계시다고 오세요. 주주총회에서의 일은 아버지하고 저하고 다 꾸며놓을게요.” 라고 말하는 아내의 권유로 1주일간 무진을 찾는다.
주인공 나는 서울에서의 실패로부터 도망해야 할 때거나 하여튼 무언가 새출발이 필요할 때 무진으로 내려갔다. 나의 무진에 대한 연상의 대부분은 나를 돌봐주고 있는 노인들에 대하여 신경질을 부리던 것과 골방 안에서의 공상과 불면을 쫓아보려고 행하던 수음(手淫)과 곧잘 편도선을 붓게 하던 독한 담배공초와 우편배달부를 기다리던 초조함 따위와 관련된 행위들이었다.
무진에 내려간 첫날, 나는 고향 후배 박(朴)의 방문을 받는다. 그리고 그날 밤 고시에 합격해 세무서장으로 있는 중학교 동창 조가 마련한 술자리에 박을 데리고 나간다. 그 술자리에서 하인숙이라는 여자가 「목포의 눈물」을 부른는데, 후배 박은 자신이 속으로 좋아하는 여자가 ‘속물들’ 틈에서 천박한 유행가를 부르는 것이 마땅치 않아 자리를 박차고 먼저 일어선다. 밤이 퍽 깊어서 나는 하인숙을 바래다주게 된다. 함께 밤길을 걷던 그 여자는 무진의 생활이 미칠 것 같다며 나에게 서울에 데려가 달라고 부탁한다.
다음날 나는 그 여자와 함께 바닷가의 옛 하숙집을 찾는다. 주인이 내준 방에서 나는 여자의 조바심을 빼앗아 주는 기분으로 그 여자와 육체 관계를 맺는다. 바닷가에서 그 여자는 나에게 <어떤 개인 날>을 불러준다. 그 때 ‘사랑한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국어의 어색함이 나의 충동을 쫓아버렸다. 급히 귀경하라는 아내의 전보를 받고 떠나며 하인숙에게 전하려고 쓰다가 편지를 찢어버린다. 무진을 떠나는 버스속에 앉아있는 자신의 모습으로 소설은 끝난다.
무진에서는 모든 사물이 모든 사고(思考)가 통금 사이렌에 흡수되어갔다. 마침내 이 세상엔 아무것도 없어져버렸다. 사이렌만이 세상에 남아 있었다. 얼마 전에 그 여자와 주고받던 그 대화들이 내 귓속에서 내 머릿속으로 자리를 옮길 때는 그리고 머릿속에서 심장 속으로 옮겨갈 때는 또 몇 개가 더 없어져버린다. 내 심장에 남을 수 있는 것은 그것뿐이었다. 그것도 일단 무진을 떠나기만 하면 내 심장 위에서 지워져버리리라.
무진에서는 누구나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다. 타인은 모두 속물들이라고, 나 역시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다. 타인이 하는 모든 행위는 무위(無爲)와 똑같은 무게밖에 가지고 있지 않은 장난이라고.
무진은 주인공인 나에게 주는 서울의 지친 삶으로부터의 힐링의 장소일까. 하인숙에게 느껴지는 미칠 것 같아 서울로 가고 싶어하는 무료한 곳일까?
무진의 안개, 손으로 잡을 수 없으면서도 그것은 뚜렷이 존재했고 사람들을 둘러쌌고 먼 곳에 있는 것으로부터 사람들을 떼어놓는다.
소설가 신경숙씨의 “나는 매번 이 소설을 읽을 적마다 새롭게 사람들이 모두 다른 방식으로 존재하고 있음을 감지한다.” 란 표현대로 소설 「무진기행」은 복잡한 사회의 혼란 속에서 타인과의 관계, 존재의 밑바닥에서 결핍된 인간임을 자각하게 하는 더 없는 좋은 책이다.